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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낭송 이문하)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새의 선물』 주인공이 당돌하게 선언한 지 어언 15년, 한 아이가 또다시 선언하네요. “엄마의 구멍을 찢고 바깥으로 나왔던 그때 그 순간, 나는 이미 끝을 경험했”노라고. 조숙한 아이들의 선언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요.
단숨에 괴물이 되어버린 아빠와 모진 매 앞에 속수무책인 엄마. 반복되는 폭력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아이는 그만 부모가 가짜라고 믿기로 했어요. 진짜 부모라면 자기 아이의 아픔을 그토록 모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밤이면 환히 불 켠 집들. 멀쩡해 보이는 집 어디에선가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린 영혼은 위기 느낀 쥐며느리처럼 오그라들고 있겠죠. ‘토끼 같은 사람’을 단숨에 괴물로 변하게 하는 무엇, 문득 마음에 한기가 드네요. 


- 2010.12.16   문학집배원  이혜경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나는 장미언니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백곰에게 내가 고아에 불쌍한 년이라고 떠벌려서가 아니라, 더러운 백곰 집에 나 혼자 두고 가서가 아니라, 짐승을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등신이어서가 아니라, 백곰에게 맞고서도 가만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나의 진짜 엄마가 될 자격이 없다. 엄마가 가짜가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가짜 엄마는 그냥 맞고만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처음엔 모든 게 내 탓인 줄 알았다. 내가 보기에 아빠가 엄마를 때릴 이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아빠는 토끼 같은 사람이었다. 곤히 잠들었을 때도 쥐의 걸음 수를 헤아릴 만큼 예민했고 하얀 밥에 반찬 양념 묻히는 걸 싫어할 만큼 깔끔했으며, 누군가에게 나쁜 말을 들으면 맨살을 사포로 문댄 것처럼 오랫동안 아파했다. 그런 사람이 단숨에 괴물로 변해서 여자를 미친 듯이 때리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엄마는 마음이 전화번호부 책장처럼 여리고 투명했다. 엄마의 마음이 구겨질 때마다 바스락바스락바스락. 그 소리 때문에 귀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한 번도 고기반찬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그건 엄마가 고기를 못 먹기 때문이다. 엄마는 고기의 벌건 살을 만지지도 못할 만큼 겁이 많았다. 내 몸에서 피가 나면 엄마가 먼저 울었다. 그런데도 자기가 맞을 때는 찍소리도 안 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나는 결국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죽어서 없어지면 아빠가 엄마를 때리지도 않을 테고, 엄마도 맞고만 있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빠와 엄마는 진짜 사이좋고 행복한 가정을 갖게 될 거라고. 그래서 처음엔, 그러니까 두 사람이 모조리 가짜라고 생각하기 전에는 나만 죽으면 만사 오케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죽지 않았고, 내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아빠는 엄마를 계속 때렸다.




작가/ 최진영
1981년 태어났으며,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제15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함.

 
낭독/ 이문하 - 배우. <블루다이아몬드>, <배반의 관계> 등 출연.

출전/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한겨레출판)

음악/ 교한

애니메이션/ 이지오

프로듀서/ 김태형



 


<문학집배원> 사업은 문학과 멀어진 국민들이 우리 문학의 향기를 더욱 가깝게 느끼며 문학적 감수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독자들이 문학을 좀더 쉽고 가깝게 만나고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입니다.

지난 2006년 5월 8일 도종환의 시배달로 시작하여, 현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주2회) 신청하신 분의 이메일로 시와 문장을 발송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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