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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권여선, 「사랑을 믿다」 중에서 (낭송 김신용, 박경미, 금빛나)



무심히 살아가다 문득 발목 잡히는 순간들이 있어요. 이별 같은 큰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사는 일이 하염없어지는 때. 그럴 때, 저는 책 속으로 도피하거나 주방으로 나가게 되더군요. 설탕을 듬뿍 넣고 과일 잼을 만들거나, 유자나 모과 따위를 잘게 썰어서 차를 담그거나.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동동 떴던 마음에 발이 생겨서 다시 땅을 딛게 되더군요. 
실연당한 친구를, 일 년 전에 똑같은 일을 겪은 그녀가 위로해주고 있어요. ‘보잘것없는 것’에 집중하는 건 어쩌면, 마음을 통째로 삼키려 드는 아픔에 작은 물꼬를 틔워주는 일인 듯해요. 지금은 고통에 절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소설 속 친구도, 언젠가는 그걸 알게 되겠지요.


 -2011.01.06   문학집배원  이혜경



권여선, 「사랑을 믿다」 중에서








일 년 전 그녀는 어떻게 숨쉬었던가. 그녀에게도 살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던가. 물론 있었을 것이다. 결코 희망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아 그녀가 그것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말이야.”
그녀의 말에 친구가 처연히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면 여전히 뭔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대관절 뭐가 남아 있다는 거야?”
“글쎄,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별로 보잘것없는 것들이긴 하지.”
“그러니 무슨 상관이야?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남아 있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친구가 한 손으로 과장되게 허공을 그렸다. 
“아니! 보잘것없어!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만 남아 있지!”
친구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그녀가 구원의 메시지를 주리라는 기대와 어떤 것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체념이 안주 반반처럼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것들이 상황을 바꿔놓거든. 거의 뒤집어놓는다고도 할 수 있어.”
친구가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상황이 뒤집힐 수 있다는 거야?”
친구는 그녀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상황이 뒤집힐 수 있다는 의미를 어떻게든 애인이 다시 돌아오게 만들 비법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선 곤란했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테면 친척집에 심부름을 간다든가, 업무 파트너의 경조사를 챙긴다든가 하는 것들. 그런 일들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친구의 눈빛에 배신감이 차올랐다. 친척집? 경조사? 친구는 그녀가 자기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힘없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차라리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주든지.”



작가/ 권여선
196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1996년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으로 『처녀치마』『분홍 리본의 시절』『내 정원의 붉은 열매』가 있고, 장편소설로 『푸르른 틈새』가 있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함.


낭독/ 김신용 - 배우. <격정만리> <바람의 정거장> 등 출연. 
   박경미 - 성우. 라디오 드라마 <파한집>, 마당극 <신흥부놀부뎐> 등 출연.
   금빛나 - 인도고전무용가. 인도에서 <먼쩌쁘레베서> 공연, 국립극장에서 <인도의 사랑과 신화> 공연 등.


출전/『내 정원의 붉은 열매』(문학동네)

음악/ 권재욱

애니메이션/ 민경

프로듀서/ 김태형


<문학집배원> 사업은 문학과 멀어진 국민들이 우리 문학의 향기를 더욱 가깝게 느끼며 문학적 감수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독자들이 문학을 좀더 쉽고 가깝게 만나고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입니다.

지난 2006년 5월 8일 도종환의 시배달로 시작하여, 현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주2회) 신청하신 분의 이메일로 시와 문장을 발송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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