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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최범석, 「여행자의 옛집」 중에서 낭송 홍서준 초등학교 동창인 기청이와 옛집이 있던 자리를 찾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그곳을 떠난 저와는 달리 그 친구는 집이 헐릴 때까지 그곳에 살았었답니다. 그곳 지리가 훤한 친구를 쫓아 옛집까지 걸어올라갔지요. 조금씩 조금씩 옛 풍경들이 떠올랐습니다. 목욕탕이 있던 자리, 그 앞 선미네 집, 전파사와 문방구…… 장미나무 한 그루가 있던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곳엔 아파트 시공사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와 거대한 구덩이가 남아 있을 뿐이었지요. 우리는 한참 동안 포클레인이 땅을 파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다방구를 하던 전봇대와 비탈길, 막다른 골목집이 있던 자리를 알아맞힐 땐 누구랄 것도 없이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지요. “집이 허물어질 땐 눈물도 안 나왔어. 얼마 뒤에 보니 흙속에 바가지.. 더보기
[문장배달] 이청해, 「나는 네가 지난여름 한 일을 알고 있다」 중에서 2011-07-07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터넷에 자신의 사진 한 장이 떠돌아다닙니다. 그것도 은밀한 엉덩이 부분이지요. ‘엉덩녀’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모자라 한 고아 소녀의 삶을 파탄으로 빠뜨린 철면피한 인간으로 몰린 겁니다. 물론 떠도는 건 엉덩이뿐입니다. 점 하나 박힌 엉덩이뿐이지요. 그런데도 안절부절입니다. “너지?” “너 아냐?” 많은 이들이 추궁하는 듯합니다. 비밀을 담아둘 수 없어 단짝 친구들에게 털어놓고야 마는데요. 다음날 엉덩녀의 정체에 대해 파다하게 소문이 퍼지고 맙니다. 이제 더는 비밀이 없습니다. 개인의 신상을 털어올리는 무슨무슨 닷컴, 잘 아실 겁니다. 이쯤 되면 어딘가에서 텔레스크린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1984”가 경고하려고 했던 미.. 더보기
[문장배달] 샤를 바라, 샤이에 롱, 「조선기행」 중에서 낭송 김민성, 이현우 2011-06-30연 배가 좀 되신 분이라면 이들의 대화가 무엇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백여 년 전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인에게 비친 한양의 모습입니다. 요강이라는 것이 희한한 물건처럼 묘사되고 있는데요, 길거리에서 볼일을 봐 걷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프랑스에 비하면 오히려 청결하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지금처럼 화장실이 집안에 없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요강이 있었습니다. 종류도 다양했고 엉덩이에 닿던 감촉도 다 달랐지요. 어린 시절, 외갓집 툇마루에도 밤이면 요강이 나와 앉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마루로 나와 요강에 걸터앉았지요. 밤새 한 데 나와 차가워질 데로 차가워진 요강에 엉덩이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습니다. 쨍하고 차갑던 그 동그라미는 아직도 엉덩이가 .. 더보기
[문장배달] 강영숙, 「라이팅 클럽」 중에서 낭송 문지현 2011-06-23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극중에서 소설가 역을 맡은 배우가 마당으로 뛰쳐나옵니다. 소설을 쓰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단어가 당최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물론 시청자인 저는 알고 있었지요. 바로 메뚜기떼. 그 장면 때문일까요. 글을 쓴 뒤로는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종이와 연필을 놓고 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잠들 무렵 떠오른 이야기들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종이에 적어두려는 거지요. 물론 지금도 행동에 옮기고 있습니다. 비몽사몽. 처음엔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을 때가 많았습니다. 획도 정확치 않은데다 글자들이 마구 겹쳐 있었지요. 그 뒤로 생각한 것이 커다란 도화지를 펼쳐두는 일이었지요. 아무리 어두워도 아무리 괘발개발이어도 글자를 알아.. 더보기
[문장배달] 권여선, 「사랑을 믿다」 중에서 (낭송 김신용, 박경미, 금빛나)  무심히 살아가다 문득 발목 잡히는 순간들이 있어요. 이별 같은 큰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사는 일이 하염없어지는 때. 그럴 때, 저는 책 속으로 도피하거나 주방으로 나가게 되더군요. 설탕을 듬뿍 넣고 과일 잼을 만들거나, 유자나 모과 따위를 잘게 썰어서 차를 담그거나.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동동 떴던 마음에 발이 생겨서 다시 땅을 딛게 되더군요. 실연당한 친구를, 일 년 전에 똑같은 일을 겪은 그녀가 위로해주고 있어요. ‘보잘것없는 것’에 집중하는 건 어쩌면, 마음을 통째로 삼키려 드는 아픔에 작은 물꼬를 틔워주는 일인 듯해요. 지금은 고통에 절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소설 속 친구도, 언젠가는 그걸 알게 되겠지요. -2011.01.06 문학집배원 이혜경 권여선, 「사랑을 믿다」 중에서 일 .. 더보기
[문장배달] 박완서, 「식사의 기쁨」 중에서 (낭송 천정하) 어떤 자리에선가, “가장 좋아하는 게 뭐예요?” 하는 물음을 받은 적이 있어요. 좋아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 그때그때 달라서 선뜻 대답할 수 없었어요. 잠깐 생각을 거친 뒤 “밥.“이라고 대답함으로써 ‘소설가의 취향’을 궁금해하던 이들을 실망하게 했지요. 식당 밥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전에는 손님에게 찬이 없어도 밥을 지어 대접해 버릇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도 집이 아닌 식당에서 밥을 사고 있더군요. 내 솜씨보다 더 낫고 찬도 다양하니까,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면서요. 천지에 골고루 내리는 눈처럼, 새해엔 따뜻한 밥상이 모든 사람의 나날에 함께하기를 빌어봅니다. -2010.12.30 문학집배원 이혜경 박완서, 「식사의 기쁨」 중에서 이 나이에 아직도 극진히 공대해야 할 웃어른이 남아 있는 건.. 더보기
[문장배달] 프리모 레비, 「옛 길들」 중에서 (낭송 박경찬, 김근) 절박하게 굶주린 사람에게 생선을 선물한 게 왜 그리 부끄러웠을까요. 체사레가 로마의 벼룩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타고난 상인이라서요? 나치 수용소에서 풀려나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의 한 마을에 수용된 체사레, 그 마을의 시장에 자리까지 확보하고 물건을 사고팔지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물을 주입해 무게를 불린 생선을 팔러 나간 체사레. 그가 걸려든 것은 소련군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장사꾼인 그에게 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지요. 이익을 남기는 게 본분인 장사꾼으로 하여금 이득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게 만든 무엇. 이 일이 체사레의 마음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지 궁금해집니다. - 2010.12.23 문학집배원 이혜경 프리모 레비, 「옛 길들」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체사레는 얼굴이 새카맣게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수중.. 더보기
[문장배달]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낭송 이문하)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새의 선물』 주인공이 당돌하게 선언한 지 어언 15년, 한 아이가 또다시 선언하네요. “엄마의 구멍을 찢고 바깥으로 나왔던 그때 그 순간, 나는 이미 끝을 경험했”노라고. 조숙한 아이들의 선언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요. 단숨에 괴물이 되어버린 아빠와 모진 매 앞에 속수무책인 엄마. 반복되는 폭력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아이는 그만 부모가 가짜라고 믿기로 했어요. 진짜 부모라면 자기 아이의 아픔을 그토록 모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밤이면 환히 불 켠 집들. 멀쩡해 보이는 집 어디에선가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린 영혼은 위기 느낀 쥐며느리처럼 오그라들고 있겠죠. ‘토끼 같은 사람’을 단숨에 괴물로 변하게 하는 무엇, 문득 마음에 한기가 드네요. - .. 더보기
[문장배달] 찰스 디킨즈, 「올리버 트위스트」 중에서 (낭송 김세동, 홍서준, 박후기) 거칠 것 없어 보이고 듬직하던 한 선배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선배에게도 피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상대방이 뻔히 사실을 알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그것도 큰소리로 말하는 어떤 이의 ‘결정적 장면’을 목격한 뒤에 그 사람이 보이면 피해 간다더군요. 그토록 듬직한 선배조차 감당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었어요. 참새가슴을 가진 사람들이야, 감당 안 되는 사람을 피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요. 올리버 트위스트에게 언어 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마구 퍼붓던 노어가, 밟히다 못해 꿈틀한 올리버 트위스트를 고발하는 대목이에요. 거짓은 참 힘이 세지요. 거짓의 기세가 거세어진 세상, 그에 휘둘리지 않고 맞설 힘이 절실해지는 요즘이에요. -2010.12.09 문학집배원 이혜.. 더보기
[문장배달] 윤성희, 「구경꾼들」 중에서 (낭송 김세동, 천정하, 홍서준) 제 상처가 너무 아파, 자기의 상처만 들여다보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을 거예요. 확대경이 눈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자기의 상처만 크게 보이는 그런 시기. 아들이 자신에게 매몰되는 걸 구해내기 위해 어머니는 과감하게 엉덩이를 드러내네요.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 부부가 즐겨 찾던 식당주인에겐 이런 기억이 있었네요. 일상에서 익히 보아온 일과 그 경계를 살짝 넘어선 이야기들이 아기자기한 이 소설을 읽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목숨 가진 것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감히 꿈꾸었는데, 이런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면, 한번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2010.12.02 문학집배원 김기택 윤성희, 「구경꾼들」 중에서 남자는 사고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 걸을 때마다 어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