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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

[시배달] 고정희, 「히브리전서(傳書)」 낭송 황혜영 고정희, 그녀는 저의 왼쪽 가슴을 이루는 제가 사랑한 많은 여자들 중 큰언니 뻘에 해당합니다.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다시 부르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옵니다. 당당한 전사이자 가장 섬세한 여자인 그녀를 사랑했어요. 1983년에 초판이 나온 시집에 들어있는 이 시를 30년 후에 읽으면서 마음이 서늘합니다. 예수는 대학에 다니지 않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밤낮없이 그에게 기도를 계속하고 있지요. 예수는 부귀를 누리지 않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부귀를 누리게 해달라고 이 순간에도 그에게 매달려 부르짖기를 계속하고 있지요. 예수가 전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지. 오늘날 예수는 정말 누구인지.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못 박힌 예수는 온 데 간 데 없고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 누리는.. 더보기
[문장배달] 최범석, 「여행자의 옛집」 중에서 낭송 홍서준 초등학교 동창인 기청이와 옛집이 있던 자리를 찾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그곳을 떠난 저와는 달리 그 친구는 집이 헐릴 때까지 그곳에 살았었답니다. 그곳 지리가 훤한 친구를 쫓아 옛집까지 걸어올라갔지요. 조금씩 조금씩 옛 풍경들이 떠올랐습니다. 목욕탕이 있던 자리, 그 앞 선미네 집, 전파사와 문방구…… 장미나무 한 그루가 있던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곳엔 아파트 시공사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와 거대한 구덩이가 남아 있을 뿐이었지요. 우리는 한참 동안 포클레인이 땅을 파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다방구를 하던 전봇대와 비탈길, 막다른 골목집이 있던 자리를 알아맞힐 땐 누구랄 것도 없이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지요. “집이 허물어질 땐 눈물도 안 나왔어. 얼마 뒤에 보니 흙속에 바가지.. 더보기
[시배달] 김근,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낭송 김근 2011-07-11 일상의 어느 하루 구름극장에 가는 상상을 해보는 건 어때요? 우리의 일상이란 대개 딱딱한 틀 속에 고정되어 있잖아요. 사람은 자연인데!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살면 병이 나지요. 오늘 우리는 구름극장에서 만나기로 해요. 구름으로 된 의자에 앉아 구름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죠. 팝콘을 쩝쩝거리다가 여기저기 밉상인 살을 조금씩 뜯어 옆자리 다른 구름들과 교환하기도 하구요. 아, 특히나 당신이라는 구름을 탐색하면서 나는 구름의 변신에 대해 골몰하지요. 나는 구름이니 오호, 신나라. 당신… 안녕하신가요? 당신은… 오직 당신인가요? 당신이란… 정말 무엇인가요? 신나는 구름극장. 태생부터 구름인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생이 나는 좋아요. 시인이 이 시에서 마침표, 쉼표, 행, 연 등을 일체 구분하지 않.. 더보기
[시배달] 김이듬, 「서머타임」 낭송 김이듬 2011-06-30 “여 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이런 노래가 있지요, 제목이 뭐였더라… 여름은 이렇게 젊음/사랑 등의 수식어와 함께 하기 십상이지만요. 이 시에 등장하는 젊음 혹은 여름은 해맑은 찬가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어조는 명랑하지만 이 명랑의 화살이 꿰뚫고 가는 여름 하늘은 춥습니다. 위세척을 한 ‘아가’라 불리는 이 젊음 앞에서 우리는 불안하게 두리번거립니다. 세상의 위협 속에서 스스로 죽어가는 젊음들. 모닝콜로 자장가를 듣는 모순이 일상화된 추운 삶. 부유하고 멋쟁이 천지인 세상의 제물들인 우리는 왜 이토록 출구가 없는가요. 여름이 제일 추운 우리의 어떤 젊음들을 위해 오늘 이 동병상련을 배달합니다. 젊어서 죽은 제니스 조플린이 생각나는 날. 하루쯤은 커피도 술도 사랑.. 더보기
[시배달] 장정일,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낭송 김산 2011-06-27 스물두 살 청년이 화자인 이 시엔 생의 힘겨움과 비애를 일찍 알아버린 소년시인의 애잔한 순수가 가득합니다. 지금은 지천명에 이른 한 작가의 글쓰기 가장 밑바닥 내밀한 곳을 보여주는 시지요. 세상의 모든 소외된 곳들에서 외롭게 칼잠 자는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을 쉬게 하고픈 선함의 파동이 뭉클합니다. 그럴 때 생은 신비합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구상에 살아서 그래도 퍽 괜찮을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은 이런 서정, 이렇듯 존재의 안쓰러움에 민감한 마음의 무늬 때문일 겁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우정의 마음.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삶에 지친 존재들을 위로하고픈 소년마리아의 노래. 이런 위로가 세상 한편에 있는 한 우리는 아직 눈물 흘려도 좋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철나무 한그루 되어주고 .. 더보기
[문장배달] 이청해, 「나는 네가 지난여름 한 일을 알고 있다」 중에서 2011-07-07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터넷에 자신의 사진 한 장이 떠돌아다닙니다. 그것도 은밀한 엉덩이 부분이지요. ‘엉덩녀’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모자라 한 고아 소녀의 삶을 파탄으로 빠뜨린 철면피한 인간으로 몰린 겁니다. 물론 떠도는 건 엉덩이뿐입니다. 점 하나 박힌 엉덩이뿐이지요. 그런데도 안절부절입니다. “너지?” “너 아냐?” 많은 이들이 추궁하는 듯합니다. 비밀을 담아둘 수 없어 단짝 친구들에게 털어놓고야 마는데요. 다음날 엉덩녀의 정체에 대해 파다하게 소문이 퍼지고 맙니다. 이제 더는 비밀이 없습니다. 개인의 신상을 털어올리는 무슨무슨 닷컴, 잘 아실 겁니다. 이쯤 되면 어딘가에서 텔레스크린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1984”가 경고하려고 했던 미.. 더보기
[문장배달] 샤를 바라, 샤이에 롱, 「조선기행」 중에서 낭송 김민성, 이현우 2011-06-30연 배가 좀 되신 분이라면 이들의 대화가 무엇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백여 년 전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인에게 비친 한양의 모습입니다. 요강이라는 것이 희한한 물건처럼 묘사되고 있는데요, 길거리에서 볼일을 봐 걷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프랑스에 비하면 오히려 청결하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지금처럼 화장실이 집안에 없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요강이 있었습니다. 종류도 다양했고 엉덩이에 닿던 감촉도 다 달랐지요. 어린 시절, 외갓집 툇마루에도 밤이면 요강이 나와 앉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마루로 나와 요강에 걸터앉았지요. 밤새 한 데 나와 차가워질 데로 차가워진 요강에 엉덩이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습니다. 쨍하고 차갑던 그 동그라미는 아직도 엉덩이가 .. 더보기
[문장배달] 강영숙, 「라이팅 클럽」 중에서 낭송 문지현 2011-06-23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극중에서 소설가 역을 맡은 배우가 마당으로 뛰쳐나옵니다. 소설을 쓰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단어가 당최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물론 시청자인 저는 알고 있었지요. 바로 메뚜기떼. 그 장면 때문일까요. 글을 쓴 뒤로는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종이와 연필을 놓고 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잠들 무렵 떠오른 이야기들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종이에 적어두려는 거지요. 물론 지금도 행동에 옮기고 있습니다. 비몽사몽. 처음엔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을 때가 많았습니다. 획도 정확치 않은데다 글자들이 마구 겹쳐 있었지요. 그 뒤로 생각한 것이 커다란 도화지를 펼쳐두는 일이었지요. 아무리 어두워도 아무리 괘발개발이어도 글자를 알아.. 더보기
[문장배달] 권여선, 「사랑을 믿다」 중에서 (낭송 김신용, 박경미, 금빛나)  무심히 살아가다 문득 발목 잡히는 순간들이 있어요. 이별 같은 큰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사는 일이 하염없어지는 때. 그럴 때, 저는 책 속으로 도피하거나 주방으로 나가게 되더군요. 설탕을 듬뿍 넣고 과일 잼을 만들거나, 유자나 모과 따위를 잘게 썰어서 차를 담그거나.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동동 떴던 마음에 발이 생겨서 다시 땅을 딛게 되더군요. 실연당한 친구를, 일 년 전에 똑같은 일을 겪은 그녀가 위로해주고 있어요. ‘보잘것없는 것’에 집중하는 건 어쩌면, 마음을 통째로 삼키려 드는 아픔에 작은 물꼬를 틔워주는 일인 듯해요. 지금은 고통에 절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소설 속 친구도, 언젠가는 그걸 알게 되겠지요. -2011.01.06 문학집배원 이혜경 권여선, 「사랑을 믿다」 중에서 일 .. 더보기
[문장배달] 박완서, 「식사의 기쁨」 중에서 (낭송 천정하) 어떤 자리에선가, “가장 좋아하는 게 뭐예요?” 하는 물음을 받은 적이 있어요. 좋아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 그때그때 달라서 선뜻 대답할 수 없었어요. 잠깐 생각을 거친 뒤 “밥.“이라고 대답함으로써 ‘소설가의 취향’을 궁금해하던 이들을 실망하게 했지요. 식당 밥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전에는 손님에게 찬이 없어도 밥을 지어 대접해 버릇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도 집이 아닌 식당에서 밥을 사고 있더군요. 내 솜씨보다 더 낫고 찬도 다양하니까,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면서요. 천지에 골고루 내리는 눈처럼, 새해엔 따뜻한 밥상이 모든 사람의 나날에 함께하기를 빌어봅니다. -2010.12.30 문학집배원 이혜경 박완서, 「식사의 기쁨」 중에서 이 나이에 아직도 극진히 공대해야 할 웃어른이 남아 있는 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