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집배원/시 배달

[시배달] 윤의섭, 「바람의 냄새」 (낭송 노계현) 몸의 기억력은 머리의 기억력보다 정확하고 섬세하죠. 건망증은 기억을 갉아먹어도 몸은 결코 제가 겪은 일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머리보다는 몸의 감각으로 사유하려 하지요. 이 시인은 냄새의 기억으로, 한때 이 땅을 살다간 수많은 삶과 죽음의 비밀을 바람 속에서 찾아내려 합니다. 그 호기심은 이 세상 구석구석에 코를 들이대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시간의 기억을 넘기도 하고, “전혀 가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처럼 공간의 기억을 넘기도 합니다. 그 후각은 “먼 혹성에 천 년 전 피었던 풀꽃 향”과 같이 우주적이며, 그 욕망은 모든 삶이 시작된 ‘발원지’를 찾아내려는 데까지 닿아있습니다. 이 코의 상상력은 수십, 수백만 년 이 땅을 살다간 선조들.. 더보기
[시배달] 김경미, 「오늘의 결심」 (낭송 김경미) 한때 시인의 욕망은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을 향하고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켰겠지요. 그러나 삶은 그 욕망을 끊임없이 좌절시켜서 진실하게 열심히 살수록 상처받고 손해 본다는 걸 인정하게 했겠지요. 이 시를 쓰게 한 힘은 바로 이러한 상처에 대한 분노와 오기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오늘의 결심’은 삶을 붙들고 아등바등 사느라 헛된 힘을 쓰지 않겠다는 것. 계산적으로 눈치 보면서 처세하여 삶이 주는 상처를 영리하게 피하겠다는 것. 이를테면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는 것.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랑은 쓸데없이 마음만 아프게 하는 순진한 태도이므로. ※ 주의 : 이 시를 읽을 땐 반어에 유의할 것. 이 시의 반성문 말투는 진실을 억압하고 얄팍한 계산을 부추기는 삶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조롱이므로.. 더보기
[시배달] 곽효환, 「지도에 없는 집」 (낭송 정인겸) 답답하다고 숨 막힌다고 아무 때나 아무 곳으로나 훌쩍 떠날 수 있나요? 생각만 해도 숨이 크게 쉬어지는 곳, 심장이 두근거리고, 기운이 솟는 곳이 마음속에 있다면 어떨까요? 투명인간이 되어 잠시 세상에서 잠적하고 싶을 때, 죽은 듯 이 세상에서 잠시 없어지고 싶을 때, 시공간의 제약 없이 바로 떠날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현실도피라고요? 백석 시인은 눈 오는 밤 나타샤와 함께 깊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며 차라리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라고 했습니다. 마음도 하나의 생태계라면 세상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공간이 필요하지요. 물론 이 공간은 허구이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자유로운 곳이죠. 시는 그런 곳에 집 짓는 일을 .. 더보기
[시배달] 박라연, 「고사목 마을」 (낭송 박신희)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잔잔하고 아름다운 선율에서 종종 진한 고통의 시간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고통을 환희로 만든 오랜 시간의 숙성을 생각하지요. 온몸을 전율시키는 마술을 피와 살결로 생각하지요.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산 채로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은 당장은 몸과 마음을 파괴할 것입니다. 시나 예술에는 그 아픔을 오랫동안 숙성시켜 환희로 바꾸는 마술적인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돌처럼 단단하게 말라 죽은 나무에서 “빛이 뭉클” 만져지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나무에서 “아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극점에서 벼락 같은 빛이 지나가 겉은 망가졌으되 내면은 밝아진 바로 그 얼굴이겠죠. -20.. 더보기
[시배달] 정철훈,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 (낭송 정철훈) 러시아어 '주라블리'는 우리말로 '백학'.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가로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죠. 남저음 목소리가 아름답고 낭만적이라 생각했는데, 아들 잃은 어머니들의 가슴과 눈에서 고통의 진액을 뽑아내는 슬픈 노래였군요. 아기는 한순간이라도 엄마에게서 떨어지면 온몸을 버둥거리며 울죠. 그때 아기와 엄마는 팔다리처럼 붙어 잘라낼 수 없는 한 몸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는 몸과 팔다리처럼 붙어 떼어낼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건 그 사람과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을 다 죽이는 것이죠. 한국전쟁부터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아직도 숨은 쉬고 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많은 어머니들을 통해 이 비극은.. 더보기
[시배달] 김광규, 「나」 (낭송 박은숙) 이름과 이름 뒤에 붙은 온갖 계급장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만, 그것이 지금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니죠. 당장 급한 밥벌이 문제,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해결하는 것만도 벅차서, '나'와 '내 삶'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런 건 먹고 사는 일을 처리하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천천히 생각해도 되는 한가한 일일지 모릅니다. 이 질문이 없는 동안은 스스로가 건강하다고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도 한없이 약해질 것입니다. 그때 이 질문은 느닷없이 기습하여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는 무엇인가?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2010.06.21 문학집배원 김기택 김광규. 「나」 (낭송 박은숙)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 더보기
[시배달] 문혜진, 「독립영양인간 1」 (낭송 문혜진) 먹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적게 먹고 적게 싸는 삶을 동경한 적은 있죠. 욕망의 근원인 몸을 고통으로 단련시키거나 모든 욕망을 놓아버리는 수행을 통해 흔들림 없는 평안을 찾고도 싶었죠. 그런데 폐로 흡수한 빗물로 에너지를 만들어 독립적으로 생존하는 '독립영양인간'이라니! 이 시인은 야생적인 상상력으로 혁명적인 진화를 꿈꾸는군요. 너무 터무니없는 상상일까요? 그러나 시인은 현실과 상상을 오가며 두 삶을 사는 사람. 세상은 조금도 바뀔 것 같지 않으니, 내 몸을 상상력으로 변형시켜서라도 나를 억압하는 모든 일과 욕망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사람. 2010.6.14 문학집배원 김기택 문혜진, 「독립영양인간 1」 (낭송 문혜진)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무엇엔가 걸맞은 행동을 하기 위해 백화점에서.. 더보기
[시배달] 김사인, 「아무도 모른다」 (낭송 김사인) 가난을 한갓 남루로 만드는 기품 있고 충만한 옛 시간들. 지나고 나야만 진정한 가치가 슬그머니 드러나는 옛것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거나 버린 것들. 이제는 기억과 감각과 정서에 기생하면서 바쁜 일상 속에서 가끔씩 드러나는 것들. 아무리 생생하게 재생해도 거품처럼 금방 꺼지는 것들. 이 보잘 것 없고 누추해 보이던 것들이 지금은 풍요를 누리는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고 김수영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추억은 위로와 평안을 주지만, 때로는 현실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하지요. -2010. 6. 7 문학집배원 김기택 김사인, 「아무도 모른다」 (낭송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더보기
[시배달] 이면우, 「거미」(낭송 이준식) 거미가 잠자리 잡아먹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거미는 잔인하게 보이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잠자리는 불쌍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 시야로 보면 약육강식도 하나의 생태계이고, 이 질서가 자연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우리 몸은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른 몸을 죽이고 먹어서 힘이 생겨야 남을 살리는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잠자리의 발버둥과 꿈틀거림과 두려움을 먹는 한 마리 거미를 보며 이 기막힌 모순을 헤아립니다. 그리고 이 불가해한 운명을 필사적으로 따르는 거미의 삶에서 한 생명체의 ‘외로움’을 봅니다. 지독한 외로움이죠. 2010.10.18 문학집배원 김기택 이면우, 「거미」(낭송 이준식)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 더보기
[시배달] 안도현「가을의 소원」 (낭송 안도현) 벌써 바람에서 마른 풀냄새 같은 게 묻어오는 듯 합니다. 봄과 여름이 성장을 향해 있다면, 가을은 생명의 포물선이 한풀 꺾이면서 소멸을 향해 기우는 계절이지요. 그래서인지 시인의 소원 또한 단출하고 담박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소원들 중 어느 것 하나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없군요. 도시에 살면서 온전한 적막과 게으름은 꿈도 꾸기 어려워졌고, 소낙비를 흠씬 맞거나 혼자 울어본 지도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침묵할 줄만 안다면 그는 충분히 아는 것”이라는 외국 속담처럼, 가을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침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에 더없이 좋은 때입니다. 2008. 9. 1. 문학집배원 나희덕. 안도현「가을의 소원」 (낭송 안도현) 가을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