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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시 배달

[시배달] 손택수, 「스프링」 (낭송 권지숙) 스프링. 몸을 배배 꼬며 웅크렸다가 일시에 반동을 이용하여 솟구치는 힘. 제 몸보다 크고 무거운 수레를 끌려면, 제 몸무게보다 훨씬 큰 삶의 짐을 감당하려면, 스프링의 탄력을 위해 먼저 제 몸을 움츠려야 하지요. 수레 끄는 사내와 미는 여자가 비틀려 흉한 모습이 된 이유는 제 안의 반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한껏 웅크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몹시 힘들고 위축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프링이 한껏 움츠린 상태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내 주변의 누군가가 무능하거나 보잘것없는 것 같이 보인다면 자신의 스프링을 최대한 움츠리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스프링의 놀라운 탄력이 감춰져 있습니다. 2010.10.04 문학집배원 김기택 손택수, 「스프링」 (낭송 권지숙) 스프링 손택수 사내가 수레.. 더보기
[시배달] 박형준, 「사랑」 (낭송 이진선) 안타깝게도 이 '사랑'은 추억과 상상 속에서만 활발하군요. 헤엄치는 오리떼를 보면서 시인은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오리처럼 힘차게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지 '하고 싶다'는 말 속에만 있습니다. 현실에서 시인은 사랑을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일 뿐이며, 그래서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해"처럼 우울합니다. 그러나 짝사랑에도 장점은 있어요. 연애 비용이 들지 않아 경제적입니다. 쉽게 변질되지 않아 순수성이 오래 유지됩니다. 상상만 하면 바로 현실이 되니까 실패 없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는 짝사랑과 공통점이 참 많네요. 2010.09.27 문학집배원 김기택 「사랑」 (낭송 이진선) 사랑 박형준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더보기
[시배달] 최승호,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낭송 윤미애) l 2010.08.30 헌 이가 빠지면 새 이가 돋고, 살이 찢어지면 새살이 돋는 몸을 어렸을 때는 신기하게 바라봤지요. 상처를 원래대로 완벽하게 회복시키는 몸의 자연적인 치유능력은 말 그대로 마술입니다. 몸이야말로 아직 문명이 침투하지 못한 원시의 생태계죠. 몸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거친 환경으로부터 살아남은 지혜와 힘의 진화 과정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이 시는 수천만 년 생명을 지켜온 노하우를 간직한 몸의 순수한 힘과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을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이 저지르는 일이 아무리 흉해도 그 손에 난 상처를 정성껏 치료하는 몸의 사랑은 마치 못난 자식을 감싸 안는 어머니 같네요. 2010.08.30 문학집배원 김기택 최승호,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낭송 윤미애) 몸의 신비, 혹은 사랑 최승호 벌어.. 더보기
[시배달] 박형권, 「우리 동네 집들」 (낭송 장인호) 이 천진스러운 시를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어려지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린이의 말을 잃지 않은 사람, 굳어져 딱딱한 고정관념이 없이 말랑말랑한 새 말을 쓰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 부릅니다. 그 어린 눈에라야 삐뚤삐뚤하게 어깨를 맞댄 집들과 그 집안에 사는 순하고 어수룩한 사람들이 한 몸이라는 게 보일 것입니다. 그 어린 귀에라야 집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연인 사이처럼, 엄마와 아기 사이처럼, 사람과 집 ‘사이’에 서로 꼭 붙어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말들이 손으로 만져질 듯합니다. 이 말들을 우리는 시라고 부릅니다. 2010.08.23 문학집배원 김기택 박형권, 「우리 동네 집들」 (낭송 장인호) 우리 동네 집들 박형권 좋은 사이들이 말을 할 때.. 더보기
[시배달] 진은영, 「물속에서」 (낭송 진은영) l 2010.08.02 어린 시절 처음 깊은 물에 빠졌을 때의 공포감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혼자라는 것의 놀라운 실감. 어둠보다도 더 강하게 세상과 차단되는 느낌.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기이한 세계. 피부로 다 만져질 것 같은 죽음. 이 섬뜩한 느낌이 땅 위에서도 순간적으로 내 몸을 관통할 때가 있습니다. 홀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일의 두려움도 깊은 물속에 혼자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만 흐르는 물에 몸을 맡깁니다. “내가 모르는” 삶의 시간이 흘러와 나를 적시고 “내가 아는 일들”로 나를 채우기를, 그리하여 내가 물이 되어 부드러워지거나 따스해지고 바다처럼 깊어지기를 기다립니다. 내 몸에는 아홉 달 동안 물속에서 살았던 모태의 기억이 있으니까요. 2010.08.02 문학집배원 .. 더보기
[시배달] 이윤학, 「버려진 식탁」 (낭송 이윤학) 한 사람 또는 한 가족의 삶이 요렇게 달랑 식탁 하나로 요약될 수도 있군요. 새 식탁을 사면 유리 깔고, 유리 밑에 행복한 사진도 끼우고, 꽃도 꽂아놓고, 따뜻한 저녁도 차리지요.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식탁은 책과 옷더미, 신문지, 냄새나는 쓰레기로 뒤덮여, 식탁이었던 기억을 잃고 잡동사니 받침대가 되지요. 한때 찍어 바르고 골라 입고 희망찬 앞날을 이야기하며 웃던 사람들의 일상은 곧 부동산과 대출, 아이 진학 문제, 악다구니, 한숨 따위가 차지해버리지요. 나는 '나'였던 기억을 잃고 온갖 삶의 잡동사니의 받침대가 되지요. 이 시의 묘미는 식탁의 길에서 사람의 길을 꿰뚫어 보기! 2010.07.26 문학집배원 김기택 이윤학, 「버려진 식탁」 (낭송 이윤학) 버려진 식탁 이윤학 언젠가 식탁을 하나 샀다, .. 더보기
[시배달]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경이로움」 (낭송 이문경) "이게 뭐야?" "왜?" 딸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이런 질문을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가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이게 뭐야?" 하고 소리치기도 했죠. 어릴 때 그토록 많았던 호기심은 다 어디 갔을까요? 왜 지금은 세상과 일상이 당연하고 자명해 보일까요? 살면서 겪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와 체념이 궁금증을 앗아간 걸까요? 왜 질문은 줄고, 고정관념은 늘어갈까요? 나, 지금, 여기, 너, 밥 먹는 일, 바람 소리, 나를 보는 강아지의 궁금한 눈빛. 이 모든 평범한 것들이 감추고 있는 참을 수 없는 경이로움. 여기에 시가 솟구치는 원천이 있을 것입니다. 시는 그 빈틈을 급습하려 하지요. 2010.07.05 문학집배원 김기택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경이로움」 (낭송 이문경) 경이로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더보기
[시배달] 이현승,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 (낭송 이현승) 지난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자살골을 넣은 한 외국 선수는 한동안 웃고 있더군요. 웃지 않고서야 자신에게 꽂히는 수억 개의 시선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두려워 떠는 웃음, 슬픈 웃음, 눈치 보는 웃음, 절망적인 웃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웃음은 증오와 절망과 치욕과 분노를 가려주는 효과적인 가면입니다. 당장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침을 막아줄 수도 있습니다(웃는 낯에 침 뱉으랴!). 내 안의 욕망이 시키는 것을 얻으려면, 견디기 힘든 삶에 아부하려면, 이런 웃음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간지럼증처럼 참을 수 없는 웃음, 눈과 주름과 피부와 세포까지 모두 웃는 본능적인 웃음 속에는 삶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오랜 진화의 지혜가 감춰져 있을 것입니다. 웃음 속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나’가 들어있.. 더보기
[시배달] 김혜순, 「잘 익은 사과 」 (낭송 문지현) 크고 잘 익은 햇사과를 사각사각 깎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사과에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천 년 동안 아가인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나요? 둥글게 둥글게 껍질 깎이는 자리가 자전거타고 상쾌하게 지나가는 좁고 구불구불한 시골길 같지 않나요? 시는 말로 되어 있고, 그 말은 사물을 닮은 가짜이지만, 시인의 욕망은 독자에게 ‘사과’라는 말이 아니라 진짜 사과를 주는 것. 그러므로 이 시를 즐기려면 사과라는 '말'을 버리고, 눈과 코와 귀의 감각을 최대한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둥글게 깎이는 작은 사과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로 바뀌는 마술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2010... 더보기
[시배달] 문정희, 「흙」 (낭송 문정희) 흙에서 어떻게 울음소리가 들릴까요? 내주기만 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흙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열매와 짐승과 사람에게 다 퍼주고도 밟히기만 한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똥오줌을 받아내 제 안에서 삭히기만 한다는 점에서도, 흙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이 시인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흙이라는 이름에서 “흙 흙 흙” 하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고, 심장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눈물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겁니다. 제 몸의 양분과 정기를 씨앗에게 부어 아이를 낳고, 제 몸과 영혼을 팔아 아이를 기르고도, 받을 것은 거의 없고 줄 것은 많이 남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2010. 5. 3. 문학집배원 김기택 문정희, 「흙」 (낭송 문정희) 흙 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