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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Best 20] 양귀자,「원미동 사람들」 (낭송 김내하, 홍성경, 임진순, 주성환)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라고 생각해요. 그 전까지는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를 확률이 많죠. 하지만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답니다. 중요한 건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누군가가 듣는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말을 잘 못한다면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되는 거예요. 꽃을 보면 지금은 세상에 없는 누군가 생각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제일 하고 싶은 일은 그 사람과 그저 한없이 얘기를 나누는 일이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얘기하세요.

 

2009. 4. 2. 문학집배원 김연수.




양귀자,「원미동 사람들」  (낭송 김내하, 홍성경, 임진순, 주성환)

 


“그렇게 바쁠 것도 없소. 먹고살자는 짓이니 좀 쉬어가며 해야지요.”

 

“그러시다면 아저씨, 저한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그냥 제 이야기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안 된다고 할까봐 그는 겁이 났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슈?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사내가 그의 말을 재촉했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봉투 속을 뒤져 팸플릿을 꺼내는 잠깐의 시간도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바싹 말라 있는 입술을 축이고 마침내 그는 대사의 첫 줄부터 읊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제까지 입 안에서만 맴돌던 대사들이 하나씩 둘씩 소리가 되어 터져나왔다. 사내의 태도도 썩 훌륭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여가며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때로는 질문도 있었다. 고객의 수준에 맞춰 알기 쉽게 대답해주는 일 또한 어려울 게 없었다.

 

말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정봉룡 회장의 말이 옳았다. 시작이 어려웠던 만큼 다음 대사는 저절로 흘러나와 강이 되어서 도도하게 흘러갔다. 움켜쥔 그의 주먹에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추위가 물러간 것은 진작부터였다. 허술만옹의 탁월한 솜씨를 묘사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말이 나비처럼 훨훨 날고 있다는 찬란한 느낌 때문에 가슴이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실습은 끝났다. 빠뜨린 대사는 하나도 없었다. 봉투 안에 팸플릿을 집어넣고 그는 이마에 밴 땀을 닦아내었다. 사내도 털모자를 꾹 눌러쓰고는 일어설 채비를 하였다.

 

“지루한 이야기를 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가 담배 한 대를 사내에게 권했다. 사내가 손을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어이구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입만 아프게 해드리고 그냥 일어서려니까 내가 되려 미안스런 판에……. 그럼 많이 파시구려.”

 

사내가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실습은 끝난 것이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 멍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텔레비전의 무협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개찰구 주변의 혼잡도 여전했다. 뭔가 미진한 느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의 옆자리에 다시 누군가가 앉았다. 돌아보니 아까의 그 짐꾼이었다.

 

“가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찜찜해서. 그 촉대라든가 촛대라는 거 그거 하나 사겠소. 제상에 촛불 켤 때 쓰면 딱 좋겠던데, 비싼 것은 못 사주더라도 그게 제일 값도 헐하니까 내 형편에 만만하고. 내가 이래 살아도 권씨 문중의 종손이라 제사가 사흘거리로 돌아오는 몸이라오.”

 

사흘거리로 돌아오는 제상에 놓을 촛대를 주문한 고객 앞에서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까의 그 쏟아져 나오던 말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렸고 이번에는 짐꾼이 자신의 대사를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짐보따리 날라다주며 먹고살긴 하지만 조상 대접만은 깍듯이 하며 살지요. 물려받은 논마지기 다 날려보내고 자식 농사나 지어볼라고 서울 와서 이 고생이오. 한때는 나도 시골 유지였다오. 행세깨나 한다는 집안에서 태어나 큰소리치고 살았는데……. 나이 오십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참 창피한 말이지만 여태 집 한 칸도 없는 신세라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안 해본 짓이 없어요. 아이들은 자꾸 굵어지지, 모아놓은 재산은 없지……. 이거 참, 권 아무개 하면 고향 동네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는데……. 이 서울 바닥에선 그냥 짐꾼 권씨로 통한다오…….

 

짐꾼 권씨의 대사도 어지간히 길었다. 사내가 그렇게 했듯이 그 또한 사내의 말을 열심히,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들어주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김제에서 올라온 누구누구 엄마는 빨리 방송실까지 와달라는 여자의 코맹맹이 음성을 넘어서, 짐꾼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출처/ 『원미동 사람들』, 살림 2004

 
작가/ 양귀자
1955년 전주에서 태어나 1978년 『문학사상』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함. 소설 『희망』『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모순』『천년의 사랑』 등이 있음. 유주현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독/
김내하 - 배우. 연극 『날 보러 와요』『이』『즐거운 인생』『꿈속의 꿈』등에 출연.
홍성경 - 배우. 연극 『황구도』『돐날』『호야』『죽도록 달린다』 등에 출연.
임진순 - 배우. 연극 『그릇 그릇』『여행』『자객열전』『벚나무 동산』 등에 출연.
주성환 - 배우. 연극 『달아달아 밝은달아』『말괄량이 길들이기』『침묵의 해협』『세일즈맨의 죽음』 등에 출연.

음악/ 김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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