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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Best 20] 이문구,「우리 동네 김씨」 (낭송 양말복, 최경원)



가능한 한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천천히 듣고 천천히 씹으십시오. 사투리를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뜻을 다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말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샅길 한구석에 조용히 피어 있는 민들레 같은, 동네 입구에 수굿이 서 있는 가래나무 같은 이런 한 대목이 우리 문학을 깊게 하고 힘있게 합니다. 굳이 외국의 문학과 견주어 잘났다 못났다 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게 합니다. 문학은 국민(한 언어권에 속한 모든 사람이니 어민이라고 할까요) 모두의 자산입니다. 이런 문학을 가진 어민은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2007. 5. 17 문학집배원 성석제



이문구,「우리 동네 김씨」  (낭송 양말복, 최경원)

 

 

  대강 정돈이 된 듯하자 면직원은 부면장을 돌아다보았다. 매양 그랬듯이 부면장은 뒤에서 서서 잇긋도 않고 방위병이 앰프 손질하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앰프와 확성기는 각각 두 대의 자전거 짐받이에 얹혀 있었으며, 수백 명의 귀청을 찢는 비명만 지를 뿐, 좀처럼 말을 들을 성싶지 않았다. 면직원이 입 다물어유, 앉어줘유, 담배들 꺼유, 소리를 두어 차례 더 외친 뒤에야 확성기는 조용할 줄 알았다. 이윽고 부면장이 명승 담배갑만한 마이크를 손아귀에 넣고 돌아서며 훅훅 불어 성능 시험을 하더니, 일 년 전의 그것에 한마디도 늘고 줄음이 없는 것 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안녕허십니까. 신을좽(申乙鍾)이올시다. 이름이 션찮여 부민장밲이는 못헙니다마는, 지가 여러분들보다 배운 게 많다거나, 워디가 잘나서 이 앞에 슨 건 아닙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교육에 면장님께서 꼭 나오실라구 허셨습니다마는 급헌 호의가 있어서 아직 못 나오시는 걸루 알구 있습니다. 호의만 끝나면 즉시 나오셔서 교육에 임허실 줄루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동안은 지가 몇 말씀 드리겄습니다."


  여기까지가 예나 이제나 조금도 변함없는 부면장의 인사였다. 부면장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런디 교육에 들어가기 전에 지가 특별히 부탁을 드리겄습니다. 제발 퇴비 좀 부지런히 해달라 이겝니다. 워떤 동네를 가볼래두 장터만 벗어났다 허면, 질바닥으 풀에 걸려 댕길 수가 웂는 실정이더라 이 얘깁니다. 아마 여러분들두 느끼셨을 중 알구 있습니다마는, 풀에 갬겨서 자즌거가 안 나가구 오도바이가 뒤루 가는 헹편이더라 이겝니다. 풀 벼서 남 줘유? 퇴비허면 누구 농사가 잘 되느냐 이 얘깁니다. 식전 저녁으루 두 짐쓱만 벼유. 그런디 저기, 저 구석은 뭣 땜이 일어났다 앉었다 허메 방정떠는겨? 왜 왔다리 갔다리 허구 떠드는 겨? 꼭 젊은 사람들이 말을 안 탄단 말여. 야— 저런 싸가지 웂는 늠으 색긔……야늠아, 말이 말 같잖여? 너만 덥네? 저늠으 색긔…… 즤 애비는 저기 즘잖게 앉어 있는디 자식은 저 지랄을 혀. 이 중에는 동기간이나 당내간은 물론이구 한 집에서 둣씩 싯씩 부자지간이 교육을 받으러 나오신 분두 즉잖은 줄로 알구 있습니다마는, 웬제구 볼 것 같으면 아버지나 윗으른은 즘잖게 시키는 대루 들으시는디, 그 자제들은 당최 말을 안 타구 속을 쎅이더라 이겝니다. 교육 중에 자리 이사 댕기구, 간첩모냥 쑥떡거리구…… 야늠아, 너 시방 워디서 담배 피는 겨? 너는 또 워디 가네? 저늠의 색긔들…… 그래두 안 꺼? 건방진 늠 같으니라구. 너 깨금말 양시환 씨 아들이지? 올 봄에 고등핵교 졸읍헌 늠 아녀? 너지? 건방머리 시여터진 늠 같으니라구."


  부면장이 한바탕 들었다 놓은 뒤에야 겨우 뭘 좀 하는 곳 같아졌다.





 

출처/ 이문구 『우리 동네』, 민음사, 1981


작가/ 이문구
1941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나 1966년『현대문학』추천을 통해 등단. 소설 『이 풍진 세상을』『관촌수필』『우리동네』『장한몽』『매월당 김시습』등이 있음. 한국일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3년 2월 타계함.


 
낭독/
양말복- 연극배우. 연극<산불> <파행> <안티고네 인 서울> <봄 날> 외 출연.
최경원- 연극배우. 연극 <만다라의 노래> <올드보이> <맥베드21> 외 출연.



<문학집배원> 사업은 문학과 멀어진 국민들이 우리 문학의 향기를 더욱 가깝게 느끼며 문학적 감수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독자들이 문학을 좀더 쉽고 가깝게 만나고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입니다.

지난 2006년 5월 8일 도종환의 시배달로 시작하여, 현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주2회) 신청하신 분의 이메일로 시와 문장을 발송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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