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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기금 문화나눔 블로그

[시배달] 안도현「가을의 소원」 (낭송 안도현) 벌써 바람에서 마른 풀냄새 같은 게 묻어오는 듯 합니다. 봄과 여름이 성장을 향해 있다면, 가을은 생명의 포물선이 한풀 꺾이면서 소멸을 향해 기우는 계절이지요. 그래서인지 시인의 소원 또한 단출하고 담박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소원들 중 어느 것 하나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없군요. 도시에 살면서 온전한 적막과 게으름은 꿈도 꾸기 어려워졌고, 소낙비를 흠씬 맞거나 혼자 울어본 지도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침묵할 줄만 안다면 그는 충분히 아는 것”이라는 외국 속담처럼, 가을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침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에 더없이 좋은 때입니다. 2008. 9. 1. 문학집배원 나희덕. 안도현「가을의 소원」 (낭송 안도현) 가을의 .. 더보기
[시배달] 손택수, 「스프링」 (낭송 권지숙) 스프링. 몸을 배배 꼬며 웅크렸다가 일시에 반동을 이용하여 솟구치는 힘. 제 몸보다 크고 무거운 수레를 끌려면, 제 몸무게보다 훨씬 큰 삶의 짐을 감당하려면, 스프링의 탄력을 위해 먼저 제 몸을 움츠려야 하지요. 수레 끄는 사내와 미는 여자가 비틀려 흉한 모습이 된 이유는 제 안의 반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한껏 웅크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몹시 힘들고 위축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프링이 한껏 움츠린 상태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내 주변의 누군가가 무능하거나 보잘것없는 것 같이 보인다면 자신의 스프링을 최대한 움츠리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스프링의 놀라운 탄력이 감춰져 있습니다. 2010.10.04 문학집배원 김기택 손택수, 「스프링」 (낭송 권지숙) 스프링 손택수 사내가 수레.. 더보기
[시배달] 박형준, 「사랑」 (낭송 이진선) 안타깝게도 이 '사랑'은 추억과 상상 속에서만 활발하군요. 헤엄치는 오리떼를 보면서 시인은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오리처럼 힘차게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지 '하고 싶다'는 말 속에만 있습니다. 현실에서 시인은 사랑을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일 뿐이며, 그래서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해"처럼 우울합니다. 그러나 짝사랑에도 장점은 있어요. 연애 비용이 들지 않아 경제적입니다. 쉽게 변질되지 않아 순수성이 오래 유지됩니다. 상상만 하면 바로 현실이 되니까 실패 없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는 짝사랑과 공통점이 참 많네요. 2010.09.27 문학집배원 김기택 「사랑」 (낭송 이진선) 사랑 박형준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더보기
[시배달] 최승호,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낭송 윤미애) l 2010.08.30 헌 이가 빠지면 새 이가 돋고, 살이 찢어지면 새살이 돋는 몸을 어렸을 때는 신기하게 바라봤지요. 상처를 원래대로 완벽하게 회복시키는 몸의 자연적인 치유능력은 말 그대로 마술입니다. 몸이야말로 아직 문명이 침투하지 못한 원시의 생태계죠. 몸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거친 환경으로부터 살아남은 지혜와 힘의 진화 과정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이 시는 수천만 년 생명을 지켜온 노하우를 간직한 몸의 순수한 힘과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을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이 저지르는 일이 아무리 흉해도 그 손에 난 상처를 정성껏 치료하는 몸의 사랑은 마치 못난 자식을 감싸 안는 어머니 같네요. 2010.08.30 문학집배원 김기택 최승호,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낭송 윤미애) 몸의 신비, 혹은 사랑 최승호 벌어.. 더보기
[시배달] 박형권, 「우리 동네 집들」 (낭송 장인호) 이 천진스러운 시를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어려지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린이의 말을 잃지 않은 사람, 굳어져 딱딱한 고정관념이 없이 말랑말랑한 새 말을 쓰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 부릅니다. 그 어린 눈에라야 삐뚤삐뚤하게 어깨를 맞댄 집들과 그 집안에 사는 순하고 어수룩한 사람들이 한 몸이라는 게 보일 것입니다. 그 어린 귀에라야 집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연인 사이처럼, 엄마와 아기 사이처럼, 사람과 집 ‘사이’에 서로 꼭 붙어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말들이 손으로 만져질 듯합니다. 이 말들을 우리는 시라고 부릅니다. 2010.08.23 문학집배원 김기택 박형권, 「우리 동네 집들」 (낭송 장인호) 우리 동네 집들 박형권 좋은 사이들이 말을 할 때.. 더보기
[시배달] 진은영, 「물속에서」 (낭송 진은영) l 2010.08.02 어린 시절 처음 깊은 물에 빠졌을 때의 공포감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혼자라는 것의 놀라운 실감. 어둠보다도 더 강하게 세상과 차단되는 느낌.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기이한 세계. 피부로 다 만져질 것 같은 죽음. 이 섬뜩한 느낌이 땅 위에서도 순간적으로 내 몸을 관통할 때가 있습니다. 홀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일의 두려움도 깊은 물속에 혼자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만 흐르는 물에 몸을 맡깁니다. “내가 모르는” 삶의 시간이 흘러와 나를 적시고 “내가 아는 일들”로 나를 채우기를, 그리하여 내가 물이 되어 부드러워지거나 따스해지고 바다처럼 깊어지기를 기다립니다. 내 몸에는 아홉 달 동안 물속에서 살았던 모태의 기억이 있으니까요. 2010.08.02 문학집배원 .. 더보기
[시배달] 이윤학, 「버려진 식탁」 (낭송 이윤학) 한 사람 또는 한 가족의 삶이 요렇게 달랑 식탁 하나로 요약될 수도 있군요. 새 식탁을 사면 유리 깔고, 유리 밑에 행복한 사진도 끼우고, 꽃도 꽂아놓고, 따뜻한 저녁도 차리지요.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식탁은 책과 옷더미, 신문지, 냄새나는 쓰레기로 뒤덮여, 식탁이었던 기억을 잃고 잡동사니 받침대가 되지요. 한때 찍어 바르고 골라 입고 희망찬 앞날을 이야기하며 웃던 사람들의 일상은 곧 부동산과 대출, 아이 진학 문제, 악다구니, 한숨 따위가 차지해버리지요. 나는 '나'였던 기억을 잃고 온갖 삶의 잡동사니의 받침대가 되지요. 이 시의 묘미는 식탁의 길에서 사람의 길을 꿰뚫어 보기! 2010.07.26 문학집배원 김기택 이윤학, 「버려진 식탁」 (낭송 이윤학) 버려진 식탁 이윤학 언젠가 식탁을 하나 샀다, .. 더보기
[문장배달] 가브리엘 루아, 「찬물 속의 송어」 중에서 (낭송 윤미애) 육 년 전, 제게 ‘장난꾸러기’라는 별명을 붙여준 어떤 아이와 헤어진 적이 있어요. 올해 여름, 다시 만난 그 애와 그 애의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했어요. 제 마음속에 있는 그 애는 호기심이 그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여섯 살 배기 꼬마인데, 제 손을 잡고 걷는 그애는 가슴에 멍울이 잡히고 어른들의 슬픔을 이해하기 시작한 소녀였어요. 아이의 꺼풀을 벗는 아이를 지켜보자니, 가슴이 저릿했어요.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여교사가 초등학교 부임했어요. 열여덟 살, 아이와 어른의 중간쯤에 걸친 나이지요. 학급에서 가장 다루기 어렵던 아이 메데릭이 그 여선생님을 사랑하네요. 아이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그 한순간을 보게 된 여교사의 마음이 절절하네요. 2010.10.14 문학집배원 이혜경 가브리엘 루아, 「.. 더보기
[시배달]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경이로움」 (낭송 이문경) "이게 뭐야?" "왜?" 딸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이런 질문을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가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이게 뭐야?" 하고 소리치기도 했죠. 어릴 때 그토록 많았던 호기심은 다 어디 갔을까요? 왜 지금은 세상과 일상이 당연하고 자명해 보일까요? 살면서 겪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와 체념이 궁금증을 앗아간 걸까요? 왜 질문은 줄고, 고정관념은 늘어갈까요? 나, 지금, 여기, 너, 밥 먹는 일, 바람 소리, 나를 보는 강아지의 궁금한 눈빛. 이 모든 평범한 것들이 감추고 있는 참을 수 없는 경이로움. 여기에 시가 솟구치는 원천이 있을 것입니다. 시는 그 빈틈을 급습하려 하지요. 2010.07.05 문학집배원 김기택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경이로움」 (낭송 이문경) 경이로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더보기
[우수문학도서] 2010년 3분기, 소설 부문 : 「갈보콩」, 「여덟 번째 방」 등 7편 선정 갈보콩 이시백 지음 실천문학사 (서울) | 2010년 6월 30일 출간 선정평 이시백의 소설은 오늘날 흔히 작품화되지 않는 농촌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때의 농촌은 단순한 소재나 배경으로서의 농촌이 아니라 동시대의 농촌으로서, 피폐해지고 변모해가는 농촌과 그 과정에서의 농민들의 간악함과 욕망, 적응양상 등을 신랄하게 다루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시백이 펼쳐 보이는 해학과 익살의 한판 해원굿 수록된 11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농촌’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여기서의 농촌은 산업화 이전의 전통적 삶터로서의 공간인 동시에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역풍을 감내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역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되는 작금의 난공사,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 하루가 멀다 하고 이물스럽게 변해가는 고향..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