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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시 배달

[시배달] 정철훈,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 (낭송 정철훈)



러시아어 '주라블리'는 우리말로 '백학'.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가로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죠. 남저음 목소리가 아름답고 낭만적이라 생각했는데, 아들 잃은 어머니들의 가슴과 눈에서 고통의 진액을 뽑아내는 슬픈 노래였군요.
아기는 한순간이라도 엄마에게서 떨어지면 온몸을 버둥거리며 울죠. 그때 아기와 엄마는 팔다리처럼 붙어 잘라낼 수 없는 한 몸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는 몸과 팔다리처럼 붙어 떼어낼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건 그 사람과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을 다 죽이는 것이죠.
한국전쟁부터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아직도 숨은 쉬고 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많은 어머니들을 통해 이 비극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2010.10.25  문학집배원   김기택




정철훈,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





죽은 병사들이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러시아 가요 「주라블리」의 가사는 진부하다
죽은 자는 죽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는다
주라블리의 하얀 날개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선에서 불똥이 튈 때 어머니는 군화를 신듯 두꺼운 양말을 조여신고 일어선다
어머니의 일생은 이미 패배한 것이어서 자식을 찾아오기 전에는 다시는 앉지도 눕지도 않을 것이다


흔히 죽은 자의 영혼은 날아오른다고 하지만 문제는 대지에 남은 육신이다
뼈와 살과 흥건한 핏물……
자작나무는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을 뿌리로 휘감으며 자란다


자작나무숲에 들어가보면 안다
잘박이는 낙엽을 밟는 순간 물컹하게 풍기는 피비린내
하늘은 어둡고 자작나무 껍질은 은박지처럼 반짝이는데 거기 맺혀 있는 건 어머니의 눈물


체첸에 파병된 아들을 찾아나선 병사들의 어머니회원들이 모스끄바에서 그로즈니까지 도보시위를 벌일 때 그들의 손에는 흰 깃발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자작나무 밑에 시체가 썩고 있다고


가슴의 붉은 리본은 아들의 전사통지
산 아들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어머니들의 걸음은 이미 총알 빗발치는 전장을 밟는다


아들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머니의 얼굴엔 수염이 자란다
그리하여 모든 병사들은 적군이 아니라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 것이다
적군은 앳된 얼굴의 체첸 전사가 아니라 그 병사의 어머니며 어머니의 심장이다


언 땅으로 눈발은 흩날리는데 거기 반쯤 묻혀 무엇인가를 움켜쥐려고 내뻗친 시신의 손목
어머니들은 얼어붙은 손목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든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라블리들이 떼지어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저 진부한 노래가
왜 어머니의 심장 속에서 흘러나오는지를




시/낭송/ 정철훈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97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백야」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카인의 정원』과 시집 『살고 싶은 아침』『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개 같은 신념』『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등이 있음.


출전/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창비)

음악/
박세준

애니메이션/
강성진

프로듀서/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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