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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릴레이 인터뷰

[문화나눔 릴레이인터뷰] 제3탄. 국악인 안숙선 님



[문화나눔 릴레이인터뷰 영상] 국악인 안숙선 님








안숙선 명창을 12월 5일 12시 세곡동 자택에서 만나서 음악 이야기와 전통나눔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안숙선 명창은 해외 공연을 통해 우리 음악을 외국에 알리는 일에도 앞장서 왔고, 전통음악의 현대적 해석을 위해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나 젊은 예술가들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소외된 계층에 문화를 나누는 활동에도 적극적인 안숙선 명창은 판소리 자체가 나눔이라고 강조한다. ‘소리를 통해 심청이와 춘향이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을 이겨내면서 현실에서의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며 공연을 통해 마음을 서로 나누고, 이해하려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안숙선 명창은 1949년 9월 5일 전북 남원 출생으로 1970년 김소희 선생 문하에 들어갔고,  1973년부터 박귀희 선생에게 가야금 병창, 가야금 산조를 이수했다. 1986년 남원 전국판소리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90년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1991년 UN가입 경축사절단공연 등 수많은 해외 공연으로 우리 음악을 전세계에 알린 바 있다. 1994년 안숙선 구음시나위(삼성 나이세스)를 출반한 이후 여러 음반을 발표해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1986년부터 판소리 다섯 바탕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를 완창 공연한 바 있다.


현재 중요무형 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중요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보유자로 현재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서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다.




지승호(이하 지) -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서는 전통 문화에 대해서 잘 이해 못하고 고루하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도 많은 것 같은데요. 그걸 많은 전통나눔 공연을 통해 깨 오신 것 같습니다. 판소리에 있어서 창자, 고수만큼 중요한 것이 관객이라고 하는데요. 청중들이 판소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흥이 안날 수 있는데, 요즘 그게 변해가는 것을 느끼시나요?


안 - 네. 옛날에는 장내가 떠나가듯이 추임새가 많이 터져 나왔잖아요. 요즘은 박수를 치거든요. 추임새와 박수는 공연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는데, 좀 다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추임새는 어떤 대목에 이르러서 감동을 했다거나 그럴 때, ‘야~’ 이러고 싶다거나, ‘저럴 수가’ 싶을 때 얼씨구 라든가 이렇게 표현되는데요. 요즘 젊은이들은 ‘아싸’한다든가 ‘브라보’ 한다든가 이렇게 하는 것 같아요.(웃음) 옛날 우리는 ‘얼씨구, 좋다’, ‘야,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형식하고 비슷하게 추임새를 넣었거든요. ‘야, 좋아, 좋아’ 이러지는 않았잖아요. 요즘 보면 젊은이들이 많이 참여를 하는데, 추임새를 어느 지점에 넣어야 될지 어떤 식으로 같이 호응해야 되는지를 잘 모르는 거죠. 왜냐하면 다양한 문화들이 들어왔는데, 그런 문화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나서 끝에 가서 한꺼번에 터뜨리거나, 앵콜을 청하는 건데요. 우리는 앵콜을 청한다기보다는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감흥이 일어날 때, 감동을 받을 때 ‘야’,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얼씨구’라고 한다거나 하는데, 그렇게 공연에 대한 특성이 이해가 덜 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역시 우리 전통문화예술은 전통문화예술을 할 수 있는, 그럴 흥취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 전문적인 공연장, 그런 곳에서 할 때, 그런 반응을 보이게 되지 않을까, 지금의 문화 공간들은 다양한 것들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그런 특성을 찾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지 - 말씀하신대로 다른 문화도 공연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전통문화나 소리를 할 수 있는 공연장은 더욱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안 - 저는 원래 다들 그렇게 주어진 여건에서 하나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 쪽을 보면 그 특성에 맞는 공연장을 지어놨어요. 일본만 해도 가부키좌 같은 공연장이 있고, 중국만 해도 다양한 경극들이 있는데, 그 특성에 맞는 공연장이 있더라고요. 거기 들어가면 모두들 그 형식에 전부 동화되는 것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지 - 54년째 소리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학들도 가르치고 계신데, 음악하는 환경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안 - 수적으로는 음악하시는 분들이나 듣는 분들이나 많이 늘어났는데요. 판소리나 우리 기악이나 춤이나 이런 전통 예술들은 사실 하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들이 더 귀명창이고요. 시각적으로도 무대에 서는 사람보다 더 잘 아는 분들이 옛날에는 관객이었어요. 그래서 옛날 선생님들 말씀 들어보면 소리하는 사람이나 무용하는 사람이나 무대에 딱 서서 관객에게 흥미를 못주면 ‘내려가라’, 이런 소리가 대번에 나왔다고 하잖아요.(웃음) 그래서 명창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첫 번째 반가(返歌)를 시작해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실력을 관객에게 전달하라고 했을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진국명산’ 이래야 되는데, 나가서 관객을 보니까 꽉 막혀가지고, ‘진국명산’이 안 되고, ‘진구명’ 이런 소리를 냈다는 거예요.(웃음) 그렇게 틀리니까, 더 헷갈려 가지고, ‘명구진구’ 하다가 꽉 막혀서 ‘죄송합니다’ 하고 내려갔다는 겁니다. 그만큼 옛날에는 귀명창 관객들이 가사나 춤동작이나 이런 것을 다 꿰고 앉아서 즐기고 들었던 거죠. 그 무대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런 것들이 ‘저 사람들이 뭘 하나?’ 하는 게 아니라 다 아는 것을 보면서 축제로 즐겼던 건데요. 요즘은 그것을 바로 이해하려고 하면 참 힘들죠. 우선 우리 전통예술들은 발산하는 것보다는 정적으로 끌어올려서 내면적인 것을 풀고, 또 풀고, 실을 풀어놓듯이 해서 풀고 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단도 사실은 단순하지는 않잖아요. 진양조만 해도 24박이라는 틀 안에 우리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담아서 시작하고, 계속 진행하고, 맺고 풀고 하는 이런 것들을 그냥 처음에 와가지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거죠. 그래서 그런 관계를 개발하려면 어릴 적부터 우리 음악에 취미를 갖게 하고, 알게 하고, 낯설지 않게 만들어줘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전통나눔 음악회


지 - 복권기금의 후원을 받아 2009년 전통나눔 음악회의 모든 공연을 무료로 진행했는데요. 6월 대구에서 첫 음악회를 개최한 이래 11월까지 총 20회 무대를 마련했다고 들었습니다. 광주에서 열린 전통나눔 음악회는 안숙선 명창과 우리나라 전통악기 중 세계화에 가장 적합하다는 평을 받는 해금의 디바 강은일 해금플러스, 타악의 마술사 공명과 재미난 소리꾼 남상일이 함께 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때 관객들 만나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안 - 복권기금으로 공연장에 올 수 있는 대중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소외계층을 찾아다니는 일은 잘하는 일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더 어려운 곳에서 우리 문화를 접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다가가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요. 어느 해까지만 하고 그 다음에는 없어지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끊임없이 쭉 나가는데, 한두 번 해보고 ‘안 된다, 된다’ 그러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갖죠. 물론 도회지에는 공연장들도 많이 있고, 그런 것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마음만 먹으면 있지만, 정말 외진 곳, 소외된 곳, 갈 수 없는 곳들, 사회와 떨어져 있는 그런 곳들도 가서 전해주는 게 참 좋다는 생각을 해요.


지 - 전통을 현대화하여 젊은 예술가, 발레리나, 비보이가 한 자리에 어우러지는 ‘전통나눔 음악회’였는데요. 젊은 친구들과 무대에 서보니 어떠시던가요?


안 - 우리 음악은 박자, 장단, 노래들이 참 변화가 많고, 다양해서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과도 어울릴 수 있어요. 다만 그것을 어떻게 새로 판을 짜줄 수가 있겠는가, ‘국악이 이해하기 어렵다, 지루하다’, 이런 편견을 깨주려면 그런 대목들을 찾아내고, 연구를 해서 연령대에 맞게, 필요한 것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요. 그런 것에 복권기금을 사용하는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려고 하면 예산이 없어서 못하는데, 예산을 받았을 때 일반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것들, 당연히 우리 순수한 전통, 전해져 내려오는 원형, 예술들, 그리고 다양한 층들을 만나기 위한 새로운 실험적인 것들을 잘 연구해서 나갔으면 합니다. 원형대로 보존을 하고, 우리 국악을 좋아하는 분들을 전통으로 다시 오게 하고, 이런 역할들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연구들을 1회성에 그치지 않고, 그런 것들이 나중에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까 고민해야죠. 지금 만든 형식이 그때 가서는 전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일들이죠.


지 - 우리 음악의 현대화라고 할까요, 퓨전이라고 할까, 대중음악이나 서양음악, 클래식과도 많은 교류를 해오셨는데요. 교류할 때 어떤 지점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나요?


안 - 일단은 우리 음악이 다른 음악과 박자 아니면 음악적인 구조로 만날 수가 있는가, 상당히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문학은 제가 시 한편을 자창해서 불러보면 늘 좋아하시니까 못 만날 이유가 없어요. 춤하고는 당연히 만나게 되고요. 사람의 인식 구조는 똑같잖아요. 그렇게 어렵다기 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다가가면 만나지고, 그래서 서로의 것들을 알게 되고, 서로의 원형이라거나 서로의 것을 즐길 수 있고요.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까, 저도 때로는 신날 때도 있고, 더 연구를 좀 해야겠다, 상당히 세밀하게 서로 만나서 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들을 했죠. 





판소리의 세계화

지 - 판소리 세계화에 공헌이 많으셨는데요. 프랑스 문화부가 안 선생님의 전통예술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서 정부가 주는 예술문학훈장을 받으셨잖아요.

안 - 저는 그때 그 훈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지도 못했고요.(웃음) 느닷없이 가니까 상을 주는데, 큰 상인지도 모르고, 그 분들이 상을 주고 그럴 때는 떠들썩하게 준 것도 아니고요. 대학병원에서 그런 분들하고 줘서 감사패 비슷한 것인가 하고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큰 상이더라고요. 저로서는 너무나 신나는 상이었어요. 우리 판소리를 프랑스에서 평가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 - 외국 예술가들이 판소리의 기본 발성에 큰 관심을 보인다고 들었는데요. 발성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안 - 글쎄요. 제가 서양음악의 발성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 힘들지만요. 우리의 발성은 노래를 위한 발성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 그러니까 나무라거나 물이라거나, 그런 것들이 변화를 일으켰을 때, 그 변화하는 것들을 우리 소리, 성음으로 그것을 어떻게 능가하게 만들어내느냐, 그렇게 하려면 그냥 노래하기 쉬운 발성만 가지고서는 소리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춤도 마찬가지구요. 이걸 모아서 한번 터트릴 때, 관객은 그걸 듣고 그 순간은 그것이 사실인양 알게 하기 위한, 그래서 옛날 선생님들은 수련을 하셨던 것 같은데요. 어떤 것이든지 수련 안하고는 안 되겠지만, 음악, 강약 이런 것들을 잘 조절하면서 만들어지는 것들, 이 소리는 단순히 노래가 아니라 크게 이야기한다면 우주 안에 있는 기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과 꿈을 소리를 통해서 다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소리를 하면서 소리 구조를 조금씩 이해해보면, 그래서 이게 끝이 없고, 끝이 없잖아요. 우리가 우주를 한마디로 작다, 크다, 크기는 크지만, 어느 정도 크다고 얘기를 못하듯이....(웃음)

지 - 소리는 목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온 몸으로 하는 것이며, 삶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셨고요. “저도 아홉 살 때 데뷔했지만 자신의 소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 백 년을 해왔지만 소리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평생 수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세월이 걸리는 일입니다. 웬만한 끈기가 없으면 국악계에서 버텨낼 수가 없지요.”라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지금도 계속 수련을 하고 계신가요?

안 - 연령대에 따라서 수련하는 것도 다 다른 것 같아요. 지금 나이를 먹었는데, 20, 30, 40대에 했던 것처럼 힘으로 밀어붙여서 소리를 표현하려고 하면 지레 못살 것 같아요.(웃음) 나이가 먹어지면 그 소리를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작게 만들고, 그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얼마나 잘 맺고, 이런 것들이 융성 깊고, 넓고, 그런 것들을 잘 뭉뚱그려서 할 수가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거 같아요.

지 - ‘전통나눔 신나는 예절학교’에도 관여하시는 것 같은데요. 청소년들과 만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좀 더 쉽게 판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고 들었습니다.

안 - 예절은 사실 우리나라가 예의 밝기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는 나라잖아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구요.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어른들의 말씀은 하나도 버릴 게 없었어요. 왜냐하면 어른들이 훨씬 오래 인생을 겪으셨기 때문에, 그게 요즘 말로 말하면 사는 노하우라고 할까요. 요즘은 그거보다는 인터넷이나 정보를 통해서 그걸 다 알아 버리는데 그것과 예절하고는 정말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이 살면서 행해야 되는 근본 자체가 우리 판소리에서처럼 춘향이는 춘향이가 추구하는 것이 또 있었잖아요. 심청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효가 있었고요. 토끼, 자라, 거북이, 그리고 영웅들이 그 난세를 살면서 생과 사가 피 튀기는 싸움을 하면서도 어디에다 가장 중요한 덕목을 뒀느냐 하면, 판소리 적벽가는요. 맨 끝을 관운장에게 뒀어요. 싸움을 훌륭하게 잘했다기보다는, 관운장은 신의나 인의를 생각했죠. 왜냐하면 약속을 하고 자기를 살려주고, 은혜를 입었을 때 내 목숨을 버릴지라도 그런 신의나 인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관운장의 덕목을 칭송하더라, 이렇게 끝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요즘은 모든 것이 경제라는 것에 힘이 실리잖아요. 그런데 돈도 많아야 되지만, 벼락 출세만 추구하고, 강하기만 하고, 이것보다는 덕이 먼저다, 그리고 약한 사람을 보살피고, 어른을 공경하고,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나만 잘났다고 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존중하고, 그게 바로 예절 교육 아니겠어요.





판소리 자체가 나눔이다

지 - “판소리 자체가 나눔이에요. 소리를 통해 심청이와 춘향이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을 이겨내면서 현실에서의 시름을 잊는 거죠. 무엇보다 공연을 통해 마음을 서로 나누며 이해하려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으신데요. 그런 공연을 많이 해오셨지 않습니까? 앞으로 그런 활동을 해나가기 위해서 이런 사회적인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안 - 지금은 춘향이나 심청이, 별주부, 자라가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간을 가지러가고, 이런 게 요즘 사람들이 볼 때는 우습겠죠.(웃음)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만은 볼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모두가 다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를 지탱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전통 문화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깊이 있게 전해줄 수 있는 그런 방법도 많이 모색했으면 좋겠고요. 열심히 성실하게는 살되, 모두 함께 이렇게 옆도 돌아보고, 뒤도 돌아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데 훨씬 더 바람직하고, 훨씬 더 여유롭고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지 - 후학들에게 음악하는 자세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요?

안 - 글쎄 제 제자들에게는 가혹한 얘기인지 모르겠는데요. 소리를 한다든가, 악기를 한다든가 창극을 한다거나 하는 제자들한테 하는 얘기는 자기 목숨을 걸라는 얘기를 하거든요.(웃음) 요즘은 목숨을 걸라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나 명분이 뚜렷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할 말은 없지만, 그것이 손에 쥐어지는, 보이는 것들이 다는 아니지 않겠는가, 한편에서 우리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잔잔히 전해주면서 때로는 그것들이 어떤 사람에게 인생의 큰 잣대가 될 수 있고, 그걸 통해서 감동을 받아서, 부모한테 정말 잘할 수 있고, 우리는 그런 정신적인, 한국 사람으로서 해야 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평생 요즘 말로 명창이 못되고, 스타가 안 되더라도 그런 일을 쭉 해나갈 때 그게 부질없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죠. 그러나 우리가 현실을 이야기 안할 수 없으니까, 활로를 찾거나 이런 것에 대해서 열심히 하되, 중요한 것은 그런 정신을 가져달라고 얘기를 하죠. 걱정은 이들을 어떻게, 자기 하고 있는 일을 내팽개치지 않고, ‘나, 이거 할 거야’ 라고 만들어주나 그것이 저로서는 걱정이 되는 부분입니다.

지 - 지금까지 경험하신 것을 나눠주고 싶은 뜻일 텐데요. 전북 남원에 판소리 교육관을 세우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들었습니다.

안 - 그것뿐만 아니라 제 집 밑에도 작은 공간을 지어놨는데, 제가 노래하는 것만 계속 여지까지 해왔기 때문에 무대에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하는 것은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운영하는 쪽에서는 젬병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역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다 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보려고 하니까, 체력적으로 부대껴서 제가 하고 있는 소리에 소홀하게 되는 거예요. 조금만 게으르면 소리는 저만치 달아나버리거든요. 소리 안하면 소리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요즘 진퇴양난이라고 해야 되나, 그리고 뭘 하나 운영하려면 상당히 그 방면에 조애가 깊어야 될 것 아니에요. 그것 하다가 노래할 시간이 없어지고, 그러면 노래도 못하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어서 그래서 곱게 노래만 할까, 이런 생각도 드는 거죠.(웃음) 노래만 잘 불러서 듣는 분들이 그 순간 행복하시다거나, 같이 분통을 터뜨린다거나, 그것이 제 장기니까, 그것이 훨씬 저답지 않나 그런 생각도 하는데요. 많은 분들이 와서 교육도 받고, 실제로 그러려고 저희 집에 그런 공간도 조그맣게 만들어놨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일반인들하고 제자들이 오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운영을 해서 되겠어요?(웃음)





판소리의 해학

지 - 심봉사에게는 불행의 연속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관객은 웃게 만드는 것, 이것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판소리의 해학인데요.

안 - 판소리 다섯 바탕은 모두 내 얘기일 수 있어요. 사회에서 활동하다가 소외됐을 때 심봉사를 보면서 처지를 비슷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고요. 젊은 분들이 왔을 때 나보다 더 못한 역경에 처해있는 심청,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는데,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모르잖아요. 희망을 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 소리를 단순하게 듣지 마시고, 다 나의 이야기다, 그래서 나의 이야긴데, 그것을 때로는 너무 사실적으로 생각하면 고통스러운데, 그걸 해학으로 풀어서 이랬다더라,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물음을 던지기도 하고, 소리를 들을 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주고받기도 하고요. 재밌어요. 어느 분이 판소리 사설을 들으면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판소리 문학이 상당한 문학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지 -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애착이 가는 소리는 있으신가요?

안 - 어느 판소리나 다 좋죠. 그런데 저는 남원이 고향이고 그러니까 춘향가에 대해서는 더 익숙하고, 춘향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관심이 가요.(웃음) 나 같으면 그렇게 매를 맞고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춘향이 고집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요.(웃음) 요즘 같아서는 인권운동가인 것 같아요. ‘내 인간의 권리를 그렇게 생각하느냐, 당신 마누라를 데려다 이렇게 수청을 들라고 하느냐’ 그렇게 따졌으니까 대단한거죠. 우리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아요.(웃음) 대신 제가 춘향 역할을 맡았으니까 무대에서 해봤지만요.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지 - 음악하시면서 가장 기뻤을 때나 보람 있었을 때는 언제인가요?

안 - 최근에 전주 가서 공연을 하고 왔는데요. 공연 하고 관객들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장수들이 전쟁에 나가면 이길 수 있는 느낌을 갖는다고 해요. 그날 가서 소리를 던져서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아, 소리에 몰입할 수 있겠구나’,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 저는 소리를 한다고 하는데, 딴청을 한다거나 하면 소리를 못하거든요. 그렇게 했을 때 저하고 함께 소리 속으로 들어와서 듣는 이도 그렇고 함께 한바탕 잘 놀았을 때 기쁘죠. 거짓말 소리를 하면 관객들이 거짓말로 해주는 거예요. 거기서 거짓말을 안 하기가 쉽지가 않아요.(웃음) 그러니까 어떤 개념을 싹 버려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따리를 풀어 놓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무대에 올라가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것이 적인데, 그 싸움을 정말 늘 해야 된다고요.(웃음) 진실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지 - 앞으로 특별한 계획은 없으신지요?

안 - 음반들이 제가 한참일 때 만들어내던 것보다는 저조한 것 같아요. 인터넷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겠지만, 그런 음반들을 쉽게 사서 들을 수 있도록, 내년에는 음반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쉽게 들을 수 있는 편곡도 해볼까 하는 생각들은 많죠. 새로운 소리들을 제가 짜다가 만 것들이 있거든요. 논개라든가, 석가모니라든가, 이런 것들을 더 구체화되게 소리를 다시 또 짜서 가르치고, 발표회도 시키고, 새로운 소리들이 많이 나와야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원래 기존의 소리들이 한이 많고, 거기에 등장하는 지역, 인물 이런 것들이 순 우리의 정서로 안 되는 부분들이 있으니까, 그런 작업들을 하는 젊은이들이 요즘 많잖아요. 그건 참 좋은 일인 것 같고요. 우리도 그런 것에 관심들을 가지고 해봐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

지 - 정리하는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주십시오.

안 - 물론 그 동안에도 항상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져주십사 하고, 우리 음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씀드렸지만요. 사실 전통음악이 저희가 할 때도 40이든, 50이 다 돼서 60이 다 돼서 ‘아, 이거였구나’, 생각할 정도로 단순히 즐기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기가 어렵구요. 쉽다고만은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런 음악들을 우리가 아무리 제대로 잘 전승을 해서 그대로 하려고 해도 들어주는 분이 없으면 안 되는데, 듣는다는 것이 하루 이틀만 듣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소리꾼하고 같이 듣고 알고 보고 해야 되기 때문에 교육 쪽에서 우리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청소년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낯설지 않게, 그런 것들을 좀 많이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실기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해야 될 것 같고요. 제 개인적으로 단 한마디 소리를 해도 모든 분들이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 좋은 그런 소리를 하다가 그만둬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많은 분들에게 소리를 들려주려면 들어주는 분들이 많고, 더 욕심을 부린다면 민간이 운영하는 극장, 민간이 운영하는 작은 창극단 이런 쪽을 정부에서 많이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고민을 해야 될 것 같고요. 곳곳에서 우리 음악을 듣고, 즐기시고, 알게 할 수 있는 전통나눔 이런 것들도 상당히 중요한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을 많이 확산됐으면 좋겠습니다.

지 - 오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