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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이신조, 「엄마와 빅토리아」 중에서 (낭송 박신희, 성경선, 장희재)



자기의 외로움에 매몰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걸 자양분 삼아 다른 이들을 다독이는 이들도 있지요.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는 박 여사는 통근하는 시외버스 안에서 흑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환갑을 넘기고도 낯선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그렇게 알게 된 빅토리아네 식구들이 말도 잘 안 통하는 박 여사를 ‘마미’라고 부를 만큼 친해졌어요.

빅토리아 일가족이 오랜만에 모이는 날, 암 수술을 받은 남편과 2년째 고시원에서 사는 아들, 역시 따로 나가 살아서 ‘넷이 모여 케이크에 초 꽂아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박 여사가 케이크를 선물하네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다가도 눈길 돌려 다른 목숨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세상의 ‘박 여사’들에게 박수를.

- 2010.11.18  문학집배원  이혜경




이신조, 「엄마와 빅토리아」 중에서


 

 


빅토리아의 큰딸은 제 두 동생이 한 손씩 낯선 동양인 아줌마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얼굴 가득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여드름이 나 있었는데, 키가 크고 늘씬한 체격이 영락없이 제 아빠를 닮은 모습이었다. 박 여사는 ‘예쁘다’ 대신 ‘닮았다’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지만 할 수 없이 제임스와 딸을 번갈아 가리키며 이런저런 손짓을 해 보였다.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빅토리아의 엄마는 뜻밖에도 157센티미터인 박 여사보다도 키가 작았다. 만지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같이 푸석푸석한 머리칼과 밀크 커피 갈색 같지도 않고 가죽 부츠 갈색 같지도 않은 피부,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 왠지 병색이 느껴졌다. 비행기를 너무 오래 타고 와서 저런가. 빅토리아와 제임스와 크리스와 안젤라는 박 여사를 모르는 두 가족에게 박 여사를 설명하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박 여사는 빅토리아의 엄마에게 웃으며 말했다.
“웰컴 투 코리아(Welcome to Korea). 빅토리아, 마이 프렌드(My friend), 굿 프렌드(Good friend)!”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놓자 크리스와 안젤라가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박 여사는 가족 한 명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라고 말한 뒤, 빅토리아에게 초 여섯 개를 건네줬다. 빅토리아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말했다.
“오우, 쌩큐. 마미, 쌩큐.”
케이크를 먹고 가라는 모두의 강력한 제의를 박 여사는 목욕 가방을 흔들며 단호히 거절했다.
“유어 패밀리(your family), 온리(only).”
엉겹결에 나온 말이지만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듯 현관문을 열어주는 빅토리아에게 박 여사는 잊지 않고 말했다.
“해브 어 나이스 데이(Have a nice day)!”
빅토리아, 우리 가족은 넷이 모여 케이크에 초 꽂아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어. 에이그, 관세음보살. 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 이신조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현대문학』 신인공모에 단편 「오징어」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새로운 천사』, 장편소설 『기대어 앉은 오후』『가상도시백서』, 서평산문집 『책의 연인』 등이 있음. 문학동네작가상 등을 수상함.


낭독/
박신희 - 성우. <주말의 명화> <과학수사대CSI>
등에 출연.
성경선 - 배우. <한여름밤의 꿈> <가내노동> 등에 출연.
장희재 - 배우. <아홉 개의 모래시계> <누가 대한민국 이십대를 구원할 것인가> 등에 출연.

출전/ 『감각의 시절』(문학과지성사)

음악/ 유리밥그릇

애니메이션/ 강성진

프로듀서/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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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5월 8일 도종환의 시배달로 시작하여, 현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주2회) 신청하신 분의 이메일로 시와 문장을 발송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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