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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고장 난 녹음기가 말하길" - 제8회 문학나눔콘서트 관람기

[문학나눔] "고장 난 녹음기가 말하길" - 제8회 문학나눔콘서트 관람기  2006.12.6


고장 난 녹음기가 말하길,
- 듣기의 방식


허윤진 | 문학평론가


  그/녀들의 말을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녹음기를 켰다. 날 것 그대로의 언어(言魚)를 채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시작부터 어긋났다. 진행을 맡은 시인 김근은 나의 녹음기가 쳐 놓은 그물을 피해 ‘뱀처럼’ 슬쩍 담을 넘어 사라졌다. 그는 소리 없는 활자들을 화면에 퉤, 퉤, 내뱉고 있었다. ‘ㅘ’나 ‘ㅢ’ 같은 모음들은 스크린의 공백 위에서 자꾸만 깨졌다. 노트북의 자판을 치는 경쾌한 소리와 씌어지는 글자들은 서로 어긋났다. 기계의 문제로 인해 미루어진 의사소통 과정이 역설적으로 우리의 의사소통을 열띠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적인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김근 시인의 말이 씌어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우연성에 의해 전개되는 말의 연쇄가 일종의 퍼포먼스로 다가왔기 때문은 아닐까. 침묵 속에서 진행되는 그의 글쓰기는 이후에 우리 앞에 등장할 다른 시인들의 말하기, 움직이기, 소리 지르기, 노래하기……를 더욱더 부각시켰다.  

  녹음기가 그/녀들의 말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의 시인들과 소설가들이 자신의 텍스트를 낭송하는 것을 기록한 테이프를 들으면서 말의 굴곡이 살아있는 지형을 더듬는 즐거움을 느꼈던 일이 문득, 기억났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읽어주는 것은 언어를 받은 산파가 그 언어의 탄생 장면을 극적으로 증거하는 행위고, 나는 은밀한 탄생의 장면이 반복되는 것을 엿듣는 일이 무척이나 즐겁다. 신달자 시인의 「넥타이」 낭독과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 낭독은 그런 산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격정적이고 생생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알려주었다. 시를 묵독할 때는 활자의 크기와 서체 등 시각적인 자질들에 의해서 언어의 물질성이 드러난다. 반면 시를 음독하게 되면 읽는 이의 목소리가 그 시에 점과 선과 면과 높이와 시간을 부여하여 입체적인 국면들이 숨쉬기 시작한다. 시를 눈으로 읽었을 때는 알기 어려웠던 휴지(休止)와 소리의 강약, 음의 고저 같은 음악적 자질들이 연주된다. 이때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악보가 된다. 그것을 연주하는 것은 온전히 시인들의 몫이다. 김선우 시인이 「목포항」을 읽고 난 뒤, 중년을 넘긴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그 시를 다시 읽었다. 그 시를 함께 중얼거리던 시인의 입술은 신달자 시인의 「넥타이」가 그렇듯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에 담았던 말의 뒷면을 어루만지고 있었을 것이다.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비단 청각적인 현상에만 국한되지는 않아서, 이미 나의 녹음기는 조금씩 탈이 나고 있었다. 배터리는 떨어져 갔고, 내 손가락은 버튼을 잘못 눌러, 테이프에 녹음된 과거의 목소리, 나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희극적인 상황.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 ‘나는 여기서 당신들의 말을 잘 듣고 있어요’라고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손에서 미끄러지는 녹음기의 신호를 알아들은 것인지, 시인들은 나를 포함한 청중을 보다 적극적으로 공연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나도, 보드게임을 좋아하고, 나도, 숨바꼭질을 하듯 옷장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 고 작은 목소리로 생각했다. 이근화 시인의 「무서운 옷장」은 보드게임 중에서 작은 나무막대들을 이용하는 게임 젠가Zenga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어떤 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로 놀이를 한다는 것은 게임으로서의 언어 놀이를 지시하는 것은 아닐까. 객석에서 무대로 올라 간 한 독자와 익명의 독자가 참여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시인은 게임을 시작한다. 나무 도막으로 쌓은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언어로 쌓은 탑인 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태의 탑처럼 연약하고도 우연적이며 일시적인 것이리라. 언어로 만들어진 그녀의 ‘무서운 옷장’은 함께 놀던 독자를 비롯한 사람들은 하나, 둘, 셋, 집어삼키고 과일처럼 맛있는 것들을 마구 내뱉었다. 마지막에 시인마저도 삼켜버린 언어의 옷장에 들어가면, 나는 어디로 나가게 될까? 언어의 옷장은 시인도, 독자도, 그 안에서 우연히 나타났다 우연히 사라져버리는 사차원의 공간이었다. 

  김경주 시인의 <우주로 날아가는 방5>와 함성호 시인의 <사물의 사랑>은 시적 언어를 발화하는 것이 곧 수행적인 행위라는 관점을 보다 극대화했다. 이제 시의 편린들은 각기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인물의 기능을 부여받는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5>는 시를 읽어주는 행위가 상황에 따라서 얼마나 희극적일 수 있는지를 구조화하고 있었다. 114에 만일 전화를 걸어서 시인으로서의 존재증명을 시도한다면? 시인이 시인임을 주장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존재를 담보해주지 못하며, 오히려 그 절실한 자기주장을 거짓말이나 농담, 장난 같은 허위적 발화로 강등시킬 따름이다. 아니, 어쩌면 실제의 발화를 교란시키고 현실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런 언어가 시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사회의 관습이 허용하지 않는 ‘나쁜’ 말들을 쏟아낸 <우주로 날아가는 방5>는 유쾌하고도 서늘한 작란(作亂)이었다. 시인은 모름지기 아름답고 곱고 순진한 말을 써야한다는 진부한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 

  함성호 시인의 <사물의 사랑>에서 시인은 대상을 명명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명명이란 얼마나 가변적이고 우연적인가. 마치 연인들이 서로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처럼. 스쳐가듯 명명된 대상들은 사랑이 끝났다고 믿는 자에게 아우성친다. 동료 시인들이 함께 참여한 이 퍼포먼스는 사랑의 유통기한이 남았음을 항변하는 이 시끄러운 사물-시인들의 아우성과 희디 흰 스크린에 일렁이는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는 구절의 파고(波高)로 붐볐다. 소리로서 움직이는 말과 이미지로서 움직이는 말은 불협화음과도 같은 혼종적인 언어의 파장을 빚어냈다. 언어는, 시는, 읽기의 수많은 방식을 감지하고 있다. 시 텍스트를 이루는 다성적 발화를 펼쳐 보이는 그의 모습은 2003년 10월 쌈지스페이스에서 공연된 <읽기의 방식전>에서 코란 성독(聲讀)과 한문 경전 성독(聲讀)을 들려주면서 읽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풍부한 내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려주었던 시인다웠다. 

  “여기에서 시는”, !, !, ! 녹음기는, 쇳소리 같은 잡음을 낸다! 이철성 시인이 「소리 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를 시각적 연극으로 고요하게 보여주고 있을 때. 감동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슬며시 드러냈다. 시적 언어는 음성과 의미의 장이 지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순간에도 탄생하지만, 그 가능성을 최대한 절제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한 구석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머리에 향로 같은 은빛 대야를 얹고,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가는 이 배우의 몸짓은 비언어적 요소가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연행자들(시인과 연주자)은 미사에 쓰이는 향처럼 은은한 내음으로 감도는 오브제를 사용하고, 장구 같은 전통적인 타악기를 비롯한 음악적 도구들을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연주함으로써, 시적 상황이 인간의 감각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일깨우는가를 보여주었다. 고통스럽게 간직해 온 인고(忍苦)의 경험이 화선지 위에서 눈물 같은 물기를 머금고 핏빛의 꽃처럼 아스라이 피어날 때, 그리고 시인의 입술에서 다시금 피어날 때,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인 사랑은 연극적 세계 안에서 미적으로 현현되었다. 시란, 언어를 뛰어넘으려는 언어가 무한한 한계를 향해 다가가는 원형(原形)적 몸짓이다. 

  신비주의적인 사제의 제사(題詞)처럼 고즈넉한 소리로 도착한 시어들을 방해한 녹음기의 잡음. 그/녀들의 말을 내 안에 가두어야겠다는 욕망을 포기하고 녹음기를 꺼버렸을 때, 기록하고 싶은 음악은, 왔다. 성기완 시인이 기타리스트로 참여하고 있는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는 언어 예술로서의 시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음악이 되는지, 혹은, 음악이 어떻게 시가 되는지 들려주었다. 「푸른 큰 쓰레기통의 뜻을 지나며 묻는 새벽」이 시인의 악기인 입과 다른 실제의 악기들로 연주된 것은 시와 음악이 상호 교차되며 서로를 배태하는 과정 자체였다. 그리고 음을 나직하게 읊조리는 보컬 남상아의 목소리나 화려하고 재기발랄한 기타 소리, 명료하고 단아한 베이스 소리, 때로는 단순하고 때로는 풍성한 드럼의 소리를 듣는 것은 언어가 재현할 수 없는 또 다른 읽기 방식과 만나는 일이었다. 공연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김경주 시인의 <우주로 날아가는 방5>와 2003년 <읽기의 방식전>에서처럼, 청중들에게 자신의 시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정말, 시는 시인에게서 독자에게로 나누어지고, 그래서 이 존재들 사이에서 나뉘는 것(分裂)이리라. 

  축제의 시간은 끝나고, 나는 다시 일상의 시간으로 귀환한다. 녹음기를 켜보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아무 것도 녹음되지 않았다. 아, 비어있는 소리와 비어있는 몸짓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녀들이 남긴 점자의 기억을 더듬더듬 어루만지며 읽기 시작한다, 읽는 것은 이제 비로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