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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시 배달

[시배달] 이현승,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 (낭송 이현승)



지난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자살골을 넣은 한 외국 선수는 한동안 웃고 있더군요. 웃지 않고서야 자신에게 꽂히는 수억 개의 시선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두려워 떠는 웃음, 슬픈 웃음, 눈치 보는 웃음, 절망적인 웃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웃음은 증오와 절망과 치욕과 분노를 가려주는 효과적인 가면입니다. 당장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침을 막아줄 수도 있습니다(웃는 낯에 침 뱉으랴!).
내 안의 욕망이 시키는 것을 얻으려면, 견디기 힘든 삶에 아부하려면, 이런 웃음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간지럼증처럼 참을 수 없는 웃음, 눈과 주름과 피부와 세포까지 모두 웃는 본능적인 웃음 속에는 삶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오랜 진화의 지혜가 감춰져 있을 것입니다. 웃음 속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나’가 들어있습니다.


2010.10.11. 문학집배원 김기택





이현승,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  (낭송 이현승)


 


이것은 웃음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있어 웃음은 보호막,
일종의 비누거품과 같다
문지르면 더 잘게, 더 많이 일어나는 거품처럼
손끝이 닿을 때마다 소스라치듯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럴 때면 나는 작은 거품들에 둘러싸인 비누가 손안에서 미끌거리는 것을 본다
작고 미끌거리고 단단한 그녀는
웃음풍선을 마신 사람처럼 기글기글 웃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
감당할 수 없는 간지러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흘러넘친다
흘러넘치는 소리를,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나는 그녀의 웃음소리에서 발견한다
작은 웃음으로 이루어진 보호막
웃음 속의 공포
이것은 공포에 관한 이야기다
 
웃음을 멈추려는 의지와
중단할 수 없는 웃음의 명령 사이에서
그녀가 미끄러지듯
분명하게
터져나오는 웃음 앞에서
나는 웃음을 금지하는 근엄한 독재자였다가
볼까지 빨개진 벌거숭이였다가
얼렁뚱땅 함께 웃고 있는 바보였다가
끝없이 터져나오는 웃음 끝에서 결국 눈물을 한 방울 짠다
그것은 슬픔 같은 것이고
그것은 공포이며
그것은 완전한 벌거숭이인 육체로서의 웃음이며
공포 속에서도 웃는 사랑이다
이것은 억압에 관한 이야기다






시/낭송_ 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2002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가 있음.

출전_ 『아이스크림과 늑대』(랜덤하우스코리아)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문학집배원> 사업은 문학과 멀어진 국민들이 우리 문학의 향기를 더욱 가깝게 느끼며 문학적 감수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독자들이 문학을 좀더 쉽고 가깝게 만나고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입니다.

지난 2006년 5월 8일 도종환의 시배달로 시작하여, 현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주2회) 신청하신 분의 이메일로 시와 문장을 발송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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