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혜경

[문장배달] 프리모 레비, 「옛 길들」 중에서 (낭송 박경찬, 김근) 절박하게 굶주린 사람에게 생선을 선물한 게 왜 그리 부끄러웠을까요. 체사레가 로마의 벼룩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타고난 상인이라서요? 나치 수용소에서 풀려나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의 한 마을에 수용된 체사레, 그 마을의 시장에 자리까지 확보하고 물건을 사고팔지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물을 주입해 무게를 불린 생선을 팔러 나간 체사레. 그가 걸려든 것은 소련군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장사꾼인 그에게 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지요. 이익을 남기는 게 본분인 장사꾼으로 하여금 이득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게 만든 무엇. 이 일이 체사레의 마음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지 궁금해집니다. - 2010.12.23 문학집배원 이혜경 프리모 레비, 「옛 길들」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체사레는 얼굴이 새카맣게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수중.. 더보기
[문화나누미] 틈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봄햇살 같은 소설가 이혜경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문학나눔] 틈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봄햇살 같은 소설가 이혜경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날아보지 않겠느냐고 날개를 퍼덕이던 새는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이었다. 다시 보면 새였다. 날아오르는 새.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순. 그 틈새기에 끼인 채, 그는 간판의 도형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 이혜경, 지난 여름, 지독히도 힘든 오춘기를 겪을 때 무심코 책장에서 뽑아 든 책에서 이 구절을 만납니다. 이미 수업시간에 분석 레포트를 쓰느라 여러 번 읽었었는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겨버린 틈새에 갇혀 이도저도 못 가는 것은 나 또한 똑같았기에 참 많이 울었고 웃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틈새가 있기에 찾아 드는 것. 날아드는 새와 새싹으로 표현된 사람들이 희망이라 부르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죠. 그 .. 더보기
[문장배달]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낭송 이문하)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새의 선물』 주인공이 당돌하게 선언한 지 어언 15년, 한 아이가 또다시 선언하네요. “엄마의 구멍을 찢고 바깥으로 나왔던 그때 그 순간, 나는 이미 끝을 경험했”노라고. 조숙한 아이들의 선언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요. 단숨에 괴물이 되어버린 아빠와 모진 매 앞에 속수무책인 엄마. 반복되는 폭력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아이는 그만 부모가 가짜라고 믿기로 했어요. 진짜 부모라면 자기 아이의 아픔을 그토록 모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밤이면 환히 불 켠 집들. 멀쩡해 보이는 집 어디에선가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린 영혼은 위기 느낀 쥐며느리처럼 오그라들고 있겠죠. ‘토끼 같은 사람’을 단숨에 괴물로 변하게 하는 무엇, 문득 마음에 한기가 드네요. - .. 더보기
[문장배달] 찰스 디킨즈, 「올리버 트위스트」 중에서 (낭송 김세동, 홍서준, 박후기) 거칠 것 없어 보이고 듬직하던 한 선배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선배에게도 피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상대방이 뻔히 사실을 알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그것도 큰소리로 말하는 어떤 이의 ‘결정적 장면’을 목격한 뒤에 그 사람이 보이면 피해 간다더군요. 그토록 듬직한 선배조차 감당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었어요. 참새가슴을 가진 사람들이야, 감당 안 되는 사람을 피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요. 올리버 트위스트에게 언어 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마구 퍼붓던 노어가, 밟히다 못해 꿈틀한 올리버 트위스트를 고발하는 대목이에요. 거짓은 참 힘이 세지요. 거짓의 기세가 거세어진 세상, 그에 휘둘리지 않고 맞설 힘이 절실해지는 요즘이에요. -2010.12.09 문학집배원 이혜.. 더보기
[문장배달] 막스 피카르트, 「동물과 침묵」 중에서 (낭송 정인겸) 초등학교 때, 저희 반엔 반벙어리인 여자애가 있었어요. 동그스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이 소처럼 순해 보이는 아이였지요. 그애가 입을 열면, 어버버버... 채 말이 되지 못한 말이 덧없이 흩어졌어요. 그 애는 말하지만, 아이들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요. 그럴 때 그 아이의 눈에 스치던 무엇. 지금 생각하면, 말로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어린 동물의 눈빛이 아니었나 싶어요.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라는 문장을 첫머리에 담고 있는 이 책은 젊은 날 가뜩이나 할 말 없던 제 입을 더 무겁게 해주었죠. 침묵이 희귀해진 시대, 침묵에 대해 말하는 문장들을 읽다 문득 밖을 내다보니 나무들. 살랑이던 잎 다 버리고 가지만 남은 나무는 묵언 정진에 든 수행자 같군요. - 2010.11.25 문학집배원 이.. 더보기
[문장배달] 이신조, 「엄마와 빅토리아」 중에서 (낭송 박신희, 성경선, 장희재) 자기의 외로움에 매몰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걸 자양분 삼아 다른 이들을 다독이는 이들도 있지요.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는 박 여사는 통근하는 시외버스 안에서 흑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환갑을 넘기고도 낯선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그렇게 알게 된 빅토리아네 식구들이 말도 잘 안 통하는 박 여사를 ‘마미’라고 부를 만큼 친해졌어요. 빅토리아 일가족이 오랜만에 모이는 날, 암 수술을 받은 남편과 2년째 고시원에서 사는 아들, 역시 따로 나가 살아서 ‘넷이 모여 케이크에 초 꽂아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박 여사가 케이크를 선물하네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다가도 눈길 돌려 다른 목숨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세상의 .. 더보기
[문장배달] 토마스 만, 「키 작은 프리데만 씨」 중에서 (낭송 노계현, 장희재) 모든 약에는 독성이 있다지요. 사고로 불구가 된 프리데만 씨. 남과 다른 신체 조건도 그의 마음을 오그라들게 할 순 없었죠. 그는 인생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교양을 쌓는 사람이었어요. 십대일 때 한 소녀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상처 받은 뒤,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는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믿었지요. 그런데 한 부인이 나타났어요. 불구의 몸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그래서 지난 삼십년 동안 당신은 행복하지 못했지요?”라고 묻는 여인. 그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싹 삭제하고 ‘불구’에 확대경을 들이댄 그 물음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마음일까요. 어쩌면 이해의 탈을 쓴 잔혹함일지도 모르겠네요. ‘물가에서 보내는 이런 여름밤’이 비극으로 저물었으니까요... 더보기
[문장배달] 무하마드 유누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중에서 (낭송 박웅선, 신용진) 인도가 확보되지 않아서 위험한 시골길을 걸을 때, 툭 튀어나오거나 푹 꺼진 보도블록 때문에 발목을 접질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요. 새로 길을 내거나 도로 공사를 하면 그 공사의 총책임자가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연약한 이와 함께 그 길을 걸어 보아야 한다는. 노모나 어린 딸, 혹은 몸이 불편한 지인과 조금만 걸어본다면 그 길이 보행자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금세 알 테고, 지금보다는 나은 길이 되리라는 생각에요.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유누스는 대학의 학과장이 되자마자 학과장실을 쪼개어 교수 연구실로 나누었다지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마이크로 크레딧 운동을 벌여 빈민들에게 자립의 기반을 심어주었고요. 탁상행정과 거리가 먼 그의 해법은 참 간결하기도 하지요. - 2010.10.28 문학집배.. 더보기
[문장배달] 가브리엘 루아, 「찬물 속의 송어」 중에서 (낭송 윤미애) 육 년 전, 제게 ‘장난꾸러기’라는 별명을 붙여준 어떤 아이와 헤어진 적이 있어요. 올해 여름, 다시 만난 그 애와 그 애의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했어요. 제 마음속에 있는 그 애는 호기심이 그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여섯 살 배기 꼬마인데, 제 손을 잡고 걷는 그애는 가슴에 멍울이 잡히고 어른들의 슬픔을 이해하기 시작한 소녀였어요. 아이의 꺼풀을 벗는 아이를 지켜보자니, 가슴이 저릿했어요.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여교사가 초등학교 부임했어요. 열여덟 살, 아이와 어른의 중간쯤에 걸친 나이지요. 학급에서 가장 다루기 어렵던 아이 메데릭이 그 여선생님을 사랑하네요. 아이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그 한순간을 보게 된 여교사의 마음이 절절하네요. 2010.10.14 문학집배원 이혜경 가브리엘 루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