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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중에서 (낭송 성경선, 정인겸)



결핍감을 다스리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거예요. 결핍의 뿌리가 깊을수록, 그걸 다스리는 방식은 중독에 가까운 증세를 보인다지요. 쇼핑 중독, 연애 중독, 알코올 중독 등등. 중독의 뿌리엔 아주 커다란 공동(空洞)이 있을 것 같아요. 타인의 말이든 마음이든, 그저 텅텅 울리다 흩어지게 하는 그런 공동이.
버림받은 아이, 머나먼 아프리카에 와서 지켜야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홀로 있는 이 소녀는 그 공동을 메우려는 듯 검은 김을 자꾸 집어먹네요. 오래 전 제가 열대에서 지낸 한때, 이방의 외로움과 우기의 막막함을 잠깐씩 잊게 해준 두리안의 그 강렬한 냄새가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코끝에 스치는 듯했어요. 

- 2010.11.04   문학집배원   이혜경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중에서





 

나는 버림받았다. 그 생각이 몸 안에 꽉 차올라 터져버릴 것만 같은 순간이 오면, 김을 먹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김을 한 조각 입에 넣으면 찝찔한 맛이 혀에 감기면서 사정없이 나부끼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바닥이 날 때까지 자꾸만 집어먹게 된다. 나는 버림받았다. 나는 집이 없다. 이 공간은 집이 아니다. 집이란, 지켜야 할 어떤 것들이 모여 있는 곳. 여긴 지켜야 할 게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그저 김 하나, 나 하나. 김 둘, 나 둘. 바바가 놀러 왔을 때, 김을 집어주며 먹어보라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검은 종이를 먹어야 해?
종이가 아니야. 이건 바다풀이야. 바닷물 속에서 자라는 풀을 말린 거야.
김조각을 입에 넣은 바바가,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는 바바가 고개를 저었다.
으, 짜. 난 맛을 모르겠어. 무슨 맛이야?
바바는 갸웃거리면서도 자꾸만 집어먹었다.
너무 먹진 마. 이건 중독이 되는 거야.
이 맛에? 카트 이파리 같은 거야? 난 모르겠는데?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고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지도 않고.
그런 건 아냐. 그래도 먹다보면, 마음이 가지런해져.
바바는 신기한 듯 김을 요리조리 돌려보더니 혀에 올려놓고는 장난스레 말했다. 혀가 아파. 아빠 없이 혼자 지낼 때면 유난히 더 먹어댔다. 바깥에 나가 몇 시간이 지나면 김을 먹고 싶어 조바심이 나곤 했다. 이미 김에 중독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팬티만 입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천천히 김을 집어먹는다. 김이 혀에 착 들러붙으면, 이상한 안도감이 든다. 눈앞의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에 흰 밥을 싸서 먹던 그 식탁 주위에 떠돌던 냄새 같은 것들이. 언젠가 셋이서 놀러 갔던 바닷가의 파도처럼 자꾸만 밀려왔다.



 

작가/ 정미경
1960년에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 소설 부문에 「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으로 『나의 피투성이 연인』『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가 있고, 장편소설로 『장밋빛 인생』『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가 있음. 오늘의 작가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독/ 성경선 - 배우. <한여름밤의 꿈> <가내노동> 등에 출연.
        정인겸 - 배우. <2009 유리동물원> <맹목> 등에 출연.

출전/ 『아프리카의 별』(문학동네)

음악/ 권재욱

애니메이션/ 이지오

프로듀서/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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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5월 8일 도종환의 시배달로 시작하여, 현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주2회) 신청하신 분의 이메일로 시와 문장을 발송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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