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집배원/시 배달

[시배달] 진은영, 「물속에서」 (낭송 진은영) l 2010.08.02



어린 시절 처음 깊은 물에 빠졌을 때의 공포감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혼자라는 것의 놀라운 실감. 어둠보다도 더 강하게 세상과 차단되는 느낌.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기이한 세계. 피부로 다 만져질 것 같은 죽음. 이 섬뜩한 느낌이 땅 위에서도 순간적으로 내 몸을 관통할 때가 있습니다.
홀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일의 두려움도 깊은 물속에 혼자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만 흐르는 물에 몸을 맡깁니다. “내가 모르는” 삶의 시간이 흘러와 나를 적시고 “내가 아는 일들”로 나를 채우기를, 그리하여 내가 물이 되어 부드러워지거나 따스해지고 바다처럼 깊어지기를 기다립니다. 내 몸에는 아홉 달 동안 물속에서 살았던 모태의 기억이 있으니까요.


2010.08.02   문학집배원  김기택





진은영, 「물속에서」  (낭송 진은영) 

<flash>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시·낭송_ 진은영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2000년 『문학과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등으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우리는 매일매일』 등이 있으며,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함.


출전_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음악_ 박세준


애니메이션_ 박상혁


프로듀서_ 김태형



 

<문학집배원> 사업은 문학과 멀어진 국민들이 우리 문학의 향기를 더욱 가깝게 느끼며 문학적 감수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독자들이 문학을 좀더 쉽고 가깝게 만나고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입니다.


지난 2006년 5월 8일 도종환의 시배달로 시작하여, 현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주2회) 신청하신 분의 이메일로 시와 문장을 발송해드리고 있습니다.


보다 자세한 사업 안내와 <문학집배원> 신청은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홈페이지(letter.munjang.or.kr)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