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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문장배달] 최범석, 「여행자의 옛집」 중에서 낭송 홍서준 초등학교 동창인 기청이와 옛집이 있던 자리를 찾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그곳을 떠난 저와는 달리 그 친구는 집이 헐릴 때까지 그곳에 살았었답니다. 그곳 지리가 훤한 친구를 쫓아 옛집까지 걸어올라갔지요. 조금씩 조금씩 옛 풍경들이 떠올랐습니다. 목욕탕이 있던 자리, 그 앞 선미네 집, 전파사와 문방구…… 장미나무 한 그루가 있던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곳엔 아파트 시공사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와 거대한 구덩이가 남아 있을 뿐이었지요. 우리는 한참 동안 포클레인이 땅을 파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다방구를 하던 전봇대와 비탈길, 막다른 골목집이 있던 자리를 알아맞힐 땐 누구랄 것도 없이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지요. “집이 허물어질 땐 눈물도 안 나왔어. 얼마 뒤에 보니 흙속에 바가지.. 더보기
[문장배달] 샤를 바라, 샤이에 롱, 「조선기행」 중에서 낭송 김민성, 이현우 2011-06-30연 배가 좀 되신 분이라면 이들의 대화가 무엇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백여 년 전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인에게 비친 한양의 모습입니다. 요강이라는 것이 희한한 물건처럼 묘사되고 있는데요, 길거리에서 볼일을 봐 걷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프랑스에 비하면 오히려 청결하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지금처럼 화장실이 집안에 없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요강이 있었습니다. 종류도 다양했고 엉덩이에 닿던 감촉도 다 달랐지요. 어린 시절, 외갓집 툇마루에도 밤이면 요강이 나와 앉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마루로 나와 요강에 걸터앉았지요. 밤새 한 데 나와 차가워질 데로 차가워진 요강에 엉덩이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습니다. 쨍하고 차갑던 그 동그라미는 아직도 엉덩이가 .. 더보기
[문장배달] 강영숙, 「라이팅 클럽」 중에서 낭송 문지현 2011-06-23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극중에서 소설가 역을 맡은 배우가 마당으로 뛰쳐나옵니다. 소설을 쓰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단어가 당최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물론 시청자인 저는 알고 있었지요. 바로 메뚜기떼. 그 장면 때문일까요. 글을 쓴 뒤로는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종이와 연필을 놓고 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잠들 무렵 떠오른 이야기들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종이에 적어두려는 거지요. 물론 지금도 행동에 옮기고 있습니다. 비몽사몽. 처음엔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을 때가 많았습니다. 획도 정확치 않은데다 글자들이 마구 겹쳐 있었지요. 그 뒤로 생각한 것이 커다란 도화지를 펼쳐두는 일이었지요. 아무리 어두워도 아무리 괘발개발이어도 글자를 알아.. 더보기
[문장배달] 프리모 레비, 「옛 길들」 중에서 (낭송 박경찬, 김근) 절박하게 굶주린 사람에게 생선을 선물한 게 왜 그리 부끄러웠을까요. 체사레가 로마의 벼룩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타고난 상인이라서요? 나치 수용소에서 풀려나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의 한 마을에 수용된 체사레, 그 마을의 시장에 자리까지 확보하고 물건을 사고팔지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물을 주입해 무게를 불린 생선을 팔러 나간 체사레. 그가 걸려든 것은 소련군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장사꾼인 그에게 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지요. 이익을 남기는 게 본분인 장사꾼으로 하여금 이득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게 만든 무엇. 이 일이 체사레의 마음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지 궁금해집니다. - 2010.12.23 문학집배원 이혜경 프리모 레비, 「옛 길들」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체사레는 얼굴이 새카맣게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수중.. 더보기
[문화나누미] 틈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봄햇살 같은 소설가 이혜경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문학나눔] 틈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봄햇살 같은 소설가 이혜경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날아보지 않겠느냐고 날개를 퍼덕이던 새는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이었다. 다시 보면 새였다. 날아오르는 새.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순. 그 틈새기에 끼인 채, 그는 간판의 도형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 이혜경, 지난 여름, 지독히도 힘든 오춘기를 겪을 때 무심코 책장에서 뽑아 든 책에서 이 구절을 만납니다. 이미 수업시간에 분석 레포트를 쓰느라 여러 번 읽었었는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겨버린 틈새에 갇혀 이도저도 못 가는 것은 나 또한 똑같았기에 참 많이 울었고 웃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틈새가 있기에 찾아 드는 것. 날아드는 새와 새싹으로 표현된 사람들이 희망이라 부르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죠. 그 .. 더보기
[문장배달]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낭송 이문하)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새의 선물』 주인공이 당돌하게 선언한 지 어언 15년, 한 아이가 또다시 선언하네요. “엄마의 구멍을 찢고 바깥으로 나왔던 그때 그 순간, 나는 이미 끝을 경험했”노라고. 조숙한 아이들의 선언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요. 단숨에 괴물이 되어버린 아빠와 모진 매 앞에 속수무책인 엄마. 반복되는 폭력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아이는 그만 부모가 가짜라고 믿기로 했어요. 진짜 부모라면 자기 아이의 아픔을 그토록 모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밤이면 환히 불 켠 집들. 멀쩡해 보이는 집 어디에선가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린 영혼은 위기 느낀 쥐며느리처럼 오그라들고 있겠죠. ‘토끼 같은 사람’을 단숨에 괴물로 변하게 하는 무엇, 문득 마음에 한기가 드네요. - .. 더보기
[문장배달] 찰스 디킨즈, 「올리버 트위스트」 중에서 (낭송 김세동, 홍서준, 박후기) 거칠 것 없어 보이고 듬직하던 한 선배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선배에게도 피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상대방이 뻔히 사실을 알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그것도 큰소리로 말하는 어떤 이의 ‘결정적 장면’을 목격한 뒤에 그 사람이 보이면 피해 간다더군요. 그토록 듬직한 선배조차 감당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었어요. 참새가슴을 가진 사람들이야, 감당 안 되는 사람을 피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요. 올리버 트위스트에게 언어 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마구 퍼붓던 노어가, 밟히다 못해 꿈틀한 올리버 트위스트를 고발하는 대목이에요. 거짓은 참 힘이 세지요. 거짓의 기세가 거세어진 세상, 그에 휘둘리지 않고 맞설 힘이 절실해지는 요즘이에요. -2010.12.09 문학집배원 이혜.. 더보기
[문장배달] 막스 피카르트, 「동물과 침묵」 중에서 (낭송 정인겸) 초등학교 때, 저희 반엔 반벙어리인 여자애가 있었어요. 동그스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이 소처럼 순해 보이는 아이였지요. 그애가 입을 열면, 어버버버... 채 말이 되지 못한 말이 덧없이 흩어졌어요. 그 애는 말하지만, 아이들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요. 그럴 때 그 아이의 눈에 스치던 무엇. 지금 생각하면, 말로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어린 동물의 눈빛이 아니었나 싶어요.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라는 문장을 첫머리에 담고 있는 이 책은 젊은 날 가뜩이나 할 말 없던 제 입을 더 무겁게 해주었죠. 침묵이 희귀해진 시대, 침묵에 대해 말하는 문장들을 읽다 문득 밖을 내다보니 나무들. 살랑이던 잎 다 버리고 가지만 남은 나무는 묵언 정진에 든 수행자 같군요. - 2010.11.25 문학집배원 이.. 더보기
[문장배달] 이신조, 「엄마와 빅토리아」 중에서 (낭송 박신희, 성경선, 장희재) 자기의 외로움에 매몰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걸 자양분 삼아 다른 이들을 다독이는 이들도 있지요.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는 박 여사는 통근하는 시외버스 안에서 흑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환갑을 넘기고도 낯선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그렇게 알게 된 빅토리아네 식구들이 말도 잘 안 통하는 박 여사를 ‘마미’라고 부를 만큼 친해졌어요. 빅토리아 일가족이 오랜만에 모이는 날, 암 수술을 받은 남편과 2년째 고시원에서 사는 아들, 역시 따로 나가 살아서 ‘넷이 모여 케이크에 초 꽂아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박 여사가 케이크를 선물하네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다가도 눈길 돌려 다른 목숨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세상의 .. 더보기
[문장배달 Best20] 외젠 다비「북호텔」 (낭송 김내하, 서이숙, 임진숙)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에는 절망이 있는 것 같아요. 절망을 넘어서면 아이는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요? 세속의 지혜들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죠. 강한 쪽에 붙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나 권력에 복종해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나. 하지만 그런 게 어른이라면 부끄럽지 않나요? 아이들 보기에 너무 부끄럽지 않나요? 어른이라면 강한 자들과 권력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파괴해도 우리 안의 다이아몬드를 부술 수는 없다고 말해야지요. 절망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어른이 되는 거지요. 정신 좀 차리지 마세요. 끝까지 예뻐지세요. 2009. 4. 9. 문학집배원 김연수. 「북호텔」 외젠 다비 월요일은 라미용이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그는 인심 좋게 차려주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