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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막스 피카르트, 「동물과 침묵」 중에서 (낭송 정인겸) 초등학교 때, 저희 반엔 반벙어리인 여자애가 있었어요. 동그스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이 소처럼 순해 보이는 아이였지요. 그애가 입을 열면, 어버버버... 채 말이 되지 못한 말이 덧없이 흩어졌어요. 그 애는 말하지만, 아이들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요. 그럴 때 그 아이의 눈에 스치던 무엇. 지금 생각하면, 말로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어린 동물의 눈빛이 아니었나 싶어요.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라는 문장을 첫머리에 담고 있는 이 책은 젊은 날 가뜩이나 할 말 없던 제 입을 더 무겁게 해주었죠. 침묵이 희귀해진 시대, 침묵에 대해 말하는 문장들을 읽다 문득 밖을 내다보니 나무들. 살랑이던 잎 다 버리고 가지만 남은 나무는 묵언 정진에 든 수행자 같군요. - 2010.11.25 문학집배원 이.. 더보기
[문장배달] 이신조, 「엄마와 빅토리아」 중에서 (낭송 박신희, 성경선, 장희재) 자기의 외로움에 매몰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걸 자양분 삼아 다른 이들을 다독이는 이들도 있지요.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는 박 여사는 통근하는 시외버스 안에서 흑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환갑을 넘기고도 낯선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그렇게 알게 된 빅토리아네 식구들이 말도 잘 안 통하는 박 여사를 ‘마미’라고 부를 만큼 친해졌어요. 빅토리아 일가족이 오랜만에 모이는 날, 암 수술을 받은 남편과 2년째 고시원에서 사는 아들, 역시 따로 나가 살아서 ‘넷이 모여 케이크에 초 꽂아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박 여사가 케이크를 선물하네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다가도 눈길 돌려 다른 목숨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세상의 .. 더보기
[문장배달 Best20] 외젠 다비「북호텔」 (낭송 김내하, 서이숙, 임진숙)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에는 절망이 있는 것 같아요. 절망을 넘어서면 아이는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요? 세속의 지혜들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죠. 강한 쪽에 붙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나 권력에 복종해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나. 하지만 그런 게 어른이라면 부끄럽지 않나요? 아이들 보기에 너무 부끄럽지 않나요? 어른이라면 강한 자들과 권력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파괴해도 우리 안의 다이아몬드를 부술 수는 없다고 말해야지요. 절망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어른이 되는 거지요. 정신 좀 차리지 마세요. 끝까지 예뻐지세요. 2009. 4. 9. 문학집배원 김연수. 「북호텔」 외젠 다비 월요일은 라미용이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그는 인심 좋게 차려주는 .. 더보기
[문장배달] 토마스 만, 「키 작은 프리데만 씨」 중에서 (낭송 노계현, 장희재) 모든 약에는 독성이 있다지요. 사고로 불구가 된 프리데만 씨. 남과 다른 신체 조건도 그의 마음을 오그라들게 할 순 없었죠. 그는 인생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교양을 쌓는 사람이었어요. 십대일 때 한 소녀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상처 받은 뒤,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는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믿었지요. 그런데 한 부인이 나타났어요. 불구의 몸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그래서 지난 삼십년 동안 당신은 행복하지 못했지요?”라고 묻는 여인. 그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싹 삭제하고 ‘불구’에 확대경을 들이댄 그 물음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마음일까요. 어쩌면 이해의 탈을 쓴 잔혹함일지도 모르겠네요. ‘물가에서 보내는 이런 여름밤’이 비극으로 저물었으니까요... 더보기
[문장배달]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중에서 (낭송 성경선, 정인겸) 결핍감을 다스리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거예요. 결핍의 뿌리가 깊을수록, 그걸 다스리는 방식은 중독에 가까운 증세를 보인다지요. 쇼핑 중독, 연애 중독, 알코올 중독 등등. 중독의 뿌리엔 아주 커다란 공동(空洞)이 있을 것 같아요. 타인의 말이든 마음이든, 그저 텅텅 울리다 흩어지게 하는 그런 공동이. 버림받은 아이, 머나먼 아프리카에 와서 지켜야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홀로 있는 이 소녀는 그 공동을 메우려는 듯 검은 김을 자꾸 집어먹네요. 오래 전 제가 열대에서 지낸 한때, 이방의 외로움과 우기의 막막함을 잠깐씩 잊게 해준 두리안의 그 강렬한 냄새가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코끝에 스치는 듯했어요. - 2010.11.04 문학집배원 이혜경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중에서 나는 버림받았다. 그 생각이.. 더보기
[문장배달] 무하마드 유누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중에서 (낭송 박웅선, 신용진) 인도가 확보되지 않아서 위험한 시골길을 걸을 때, 툭 튀어나오거나 푹 꺼진 보도블록 때문에 발목을 접질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요. 새로 길을 내거나 도로 공사를 하면 그 공사의 총책임자가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연약한 이와 함께 그 길을 걸어 보아야 한다는. 노모나 어린 딸, 혹은 몸이 불편한 지인과 조금만 걸어본다면 그 길이 보행자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금세 알 테고, 지금보다는 나은 길이 되리라는 생각에요.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유누스는 대학의 학과장이 되자마자 학과장실을 쪼개어 교수 연구실로 나누었다지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마이크로 크레딧 운동을 벌여 빈민들에게 자립의 기반을 심어주었고요. 탁상행정과 거리가 먼 그의 해법은 참 간결하기도 하지요. - 2010.10.28 문학집배.. 더보기
[문장배달 Best20] 니콜 크라우스「사랑의 역사」 (낭송 서현철, 김기연, 이화룡) 어제 밤하늘을 보셨나요? 이틀 동안 천둥이 치며 비가 내렸고 기온은 떨어졌고 기분은 우울해졌는데, 어젯밤 하늘에는 밭이랑 같은 하얀 구름들이 줄지어 서 있었거든요. 그리고 반달이 떠 있었어요. 서울에서 친구가 일산까지 찾아왔기에 만나러 나가던 길이었어요. 그러다가 그만 환하게 개는 밤하늘을 본 거예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중얼거렸어요. “야, 정말 멋진 밤하늘이야.” 이 며칠 우울했는데, 하지만 그걸 표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걸 금방 알아차리고 있었던 친구가 걱정스럽게 물었어요. “이제 괜찮아?” 걱정하는 친구 때문에 우울한 표정을 계속 지었지만, 사실 이미 달을 봤기 때문에, 또 내색하지 않고 두고봐주는 친구가, 그것도 앞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었지요. 다행히도 저 역시 점점 더 .. 더보기
[문장배달 Best20] 성석제「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낭송 이연규, 선종남) 언젠가 스페인에 가서 한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 할머니에게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죠. 상대의 모든 말을 한 번 더 따라하면서 박장대소하는 재능이었어요. 그 웃음에 전염이 돼서 급기야는 제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할머니는 그게 정말 우스운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웃었어요. 저도 지기 싫어서 손뼉을 쳐가면서 웃었어요. 할머니의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 전 취미가 소원리스트 만들기인데, 그 때 소원이 하나 더 추가됐어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 되기. 식당에서 사람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로 크게 웃는 법을 배우기. 이건 누군가 웃으면 반드시 따라 웃어야만 이룰 수 있는 소원이죠. 2009. 3. 19. 문학집배원 김연수.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성석제 .. 더보기
[문장배달 Best20] 박현욱의「아내가 결혼했다」 (낭송 박남희, 박지일) 이런 경우를 두고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는 건가요? 아니면 ‘원래 사랑이라는 게, 인생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라고 하는 걸까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노래가 우리가 부르는 가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대만을 기다린다느니, 사랑, 영원, 이런 맹세투의 말에는 헤어짐의 씨앗이 들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증오에 차서 서로를 저주하다가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노래는 물론이고 소설 주인공들 간의 대화도 참 리듬감이 있지요? 대화와 노래 사이의 문장에도 노래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건 사람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문학집배원 성석제. 2007. 7. 26 「아내가 결혼했다」 박현욱 말 그대로 꿈만 같은 신혼여.. 더보기
[문장배달 Best20] 김애란「나는 편의점에 간다」 (낭송 박지아) 6월21일 통계청이 내놓은 '2005년 기준 서비스업 총조사 결과로 본 소매업과 숙박·음식점, 사업서비스업의 구조변화'(이름이 좀 길죠? 하는 일이 많은 데는 별 생각 없이 이런 식의 제목을 뽑는 것 같습니다)에 따르면 24시 편의점 등 체인화 편의점은 2001년 4,116개에서 2005년 10,034개로 4년 만에 143.8%(5,918개) 증가했습니다. 같은 기간에 대형소매점도 238개에서 316개로 32.8%(78개) 늘었네요. 하지만 주택가 근처에 많았던 구멍가게(기타 음식료품 위주 종합소매업)는 107,365개에서 10.6%(11,398개)가 감소한 95,967개로 줄었습니다. 편의점은 이제 도시인, 아니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편리와 필요’의 저장고, 무소부재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