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집배원/문장 배달

[문장배달 Best20] 강신재「젊은 느티나무」 (낭송 정인겸, 박유밀)


소설을 두고 ‘풍속의 역사’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모여 기록이 될 때 역사가 되는데 소설은 특히 희로애락에 흔들리는 삶의 다양한 양태를 담아냅니다.
소설의 한 문장이 당대 풍속의 예민한 부분을 압축해서 보여줄 수도 있는데 이 소설의 첫 대목이 바로 그런 상징적인 예입니다. ‘그에게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는 이 한 문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누가 남학생들에게 팔렸을지. 그걸 알았다면 비누 회사들이 이 소설가에게 감사장을 줬어야 했을겁니다. 어쩌면 지금 당장까지도.

2007. 1. 31.  문학집배원 성석제




강신재「젊은 느티나무」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
  그가 이삼 미터의 거리까지 와서 멈추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저절로 그편으로 내달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젊은 느티나무 둥치를 붙든 것이었다.
  “그래, 숙희, 그 나무를 놓지 말어. 놓지 말고 내 말을 들어.”
  그는 자기도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말하였다. 그 얼굴에는 무언지 참담한 것이 있었다. (…)
  그는 부르쥔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말 알아 주겠어, 숙희?”
  나는 눈물을 그득 담고 끄덕여 보였다. 내 삶은 끝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겠지? 내일이건 모레건 되도록 속히…….”
  나는 또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 그럼.”
  그는 억지로처럼 조금 미소하였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산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출전/ 젊은 느티나무』, 1994 소담출판사

 

작가/ 강신재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49년『문예』에 소설을 발표하며 등단. 소설『임진강의 민들레』『오늘과 내일』『파도』등이 있으며, 한국문학가 협회상, 여류문학상, 중앙문화대상, 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1년 5월 작고함.

 

낭독/ 
정인겸 - 배우. 연극 <보이첵> <호텔 피닉스에서 잠들고 싶다> <관객모독> <살색안개> 등에 출연. 
박유밀 - 배우. <연극열전 불좀 꺼주세요> <나부상화> 등에 출연.

 

 

<문학집배원> 사업은 문학과 멀어진 국민들이 우리 문학의 향기를 더욱 가깝게 느끼며 문학적 감수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독자들이 문학을 좀더 쉽고 가깝게 만나고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입니다.

지난 2006년 5월 8일 도종환의 시배달로 시작하여, 현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주2회) 신청하신 분의 이메일로 시와 문장을 발송해드리고 있습니다.

보다 자세한 사업 안내와 <문학집배원> 신청은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홈페이지(letter.munjang.or.kr)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