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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집배원

[시배달] 김경미, 「오늘의 결심」 (낭송 김경미) 한때 시인의 욕망은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을 향하고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켰겠지요. 그러나 삶은 그 욕망을 끊임없이 좌절시켜서 진실하게 열심히 살수록 상처받고 손해 본다는 걸 인정하게 했겠지요. 이 시를 쓰게 한 힘은 바로 이러한 상처에 대한 분노와 오기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오늘의 결심’은 삶을 붙들고 아등바등 사느라 헛된 힘을 쓰지 않겠다는 것. 계산적으로 눈치 보면서 처세하여 삶이 주는 상처를 영리하게 피하겠다는 것. 이를테면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는 것.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랑은 쓸데없이 마음만 아프게 하는 순진한 태도이므로. ※ 주의 : 이 시를 읽을 땐 반어에 유의할 것. 이 시의 반성문 말투는 진실을 억압하고 얄팍한 계산을 부추기는 삶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조롱이므로.. 더보기
[문장배달] 토마스 만, 「키 작은 프리데만 씨」 중에서 (낭송 노계현, 장희재) 모든 약에는 독성이 있다지요. 사고로 불구가 된 프리데만 씨. 남과 다른 신체 조건도 그의 마음을 오그라들게 할 순 없었죠. 그는 인생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교양을 쌓는 사람이었어요. 십대일 때 한 소녀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상처 받은 뒤,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는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믿었지요. 그런데 한 부인이 나타났어요. 불구의 몸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그래서 지난 삼십년 동안 당신은 행복하지 못했지요?”라고 묻는 여인. 그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싹 삭제하고 ‘불구’에 확대경을 들이댄 그 물음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마음일까요. 어쩌면 이해의 탈을 쓴 잔혹함일지도 모르겠네요. ‘물가에서 보내는 이런 여름밤’이 비극으로 저물었으니까요... 더보기
[문장배달]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중에서 (낭송 성경선, 정인겸) 결핍감을 다스리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거예요. 결핍의 뿌리가 깊을수록, 그걸 다스리는 방식은 중독에 가까운 증세를 보인다지요. 쇼핑 중독, 연애 중독, 알코올 중독 등등. 중독의 뿌리엔 아주 커다란 공동(空洞)이 있을 것 같아요. 타인의 말이든 마음이든, 그저 텅텅 울리다 흩어지게 하는 그런 공동이. 버림받은 아이, 머나먼 아프리카에 와서 지켜야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홀로 있는 이 소녀는 그 공동을 메우려는 듯 검은 김을 자꾸 집어먹네요. 오래 전 제가 열대에서 지낸 한때, 이방의 외로움과 우기의 막막함을 잠깐씩 잊게 해준 두리안의 그 강렬한 냄새가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코끝에 스치는 듯했어요. - 2010.11.04 문학집배원 이혜경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중에서 나는 버림받았다. 그 생각이.. 더보기
[시배달] 곽효환, 「지도에 없는 집」 (낭송 정인겸) 답답하다고 숨 막힌다고 아무 때나 아무 곳으로나 훌쩍 떠날 수 있나요? 생각만 해도 숨이 크게 쉬어지는 곳, 심장이 두근거리고, 기운이 솟는 곳이 마음속에 있다면 어떨까요? 투명인간이 되어 잠시 세상에서 잠적하고 싶을 때, 죽은 듯 이 세상에서 잠시 없어지고 싶을 때, 시공간의 제약 없이 바로 떠날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현실도피라고요? 백석 시인은 눈 오는 밤 나타샤와 함께 깊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며 차라리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라고 했습니다. 마음도 하나의 생태계라면 세상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공간이 필요하지요. 물론 이 공간은 허구이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자유로운 곳이죠. 시는 그런 곳에 집 짓는 일을 .. 더보기
[시배달] 박라연, 「고사목 마을」 (낭송 박신희)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잔잔하고 아름다운 선율에서 종종 진한 고통의 시간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고통을 환희로 만든 오랜 시간의 숙성을 생각하지요. 온몸을 전율시키는 마술을 피와 살결로 생각하지요.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산 채로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은 당장은 몸과 마음을 파괴할 것입니다. 시나 예술에는 그 아픔을 오랫동안 숙성시켜 환희로 바꾸는 마술적인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돌처럼 단단하게 말라 죽은 나무에서 “빛이 뭉클” 만져지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나무에서 “아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극점에서 벼락 같은 빛이 지나가 겉은 망가졌으되 내면은 밝아진 바로 그 얼굴이겠죠. -20.. 더보기
[시배달] 정철훈,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 (낭송 정철훈) 러시아어 '주라블리'는 우리말로 '백학'.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가로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죠. 남저음 목소리가 아름답고 낭만적이라 생각했는데, 아들 잃은 어머니들의 가슴과 눈에서 고통의 진액을 뽑아내는 슬픈 노래였군요. 아기는 한순간이라도 엄마에게서 떨어지면 온몸을 버둥거리며 울죠. 그때 아기와 엄마는 팔다리처럼 붙어 잘라낼 수 없는 한 몸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는 몸과 팔다리처럼 붙어 떼어낼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건 그 사람과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을 다 죽이는 것이죠. 한국전쟁부터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아직도 숨은 쉬고 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많은 어머니들을 통해 이 비극은.. 더보기
[문장배달] 무하마드 유누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중에서 (낭송 박웅선, 신용진) 인도가 확보되지 않아서 위험한 시골길을 걸을 때, 툭 튀어나오거나 푹 꺼진 보도블록 때문에 발목을 접질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요. 새로 길을 내거나 도로 공사를 하면 그 공사의 총책임자가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연약한 이와 함께 그 길을 걸어 보아야 한다는. 노모나 어린 딸, 혹은 몸이 불편한 지인과 조금만 걸어본다면 그 길이 보행자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금세 알 테고, 지금보다는 나은 길이 되리라는 생각에요.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유누스는 대학의 학과장이 되자마자 학과장실을 쪼개어 교수 연구실로 나누었다지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마이크로 크레딧 운동을 벌여 빈민들에게 자립의 기반을 심어주었고요. 탁상행정과 거리가 먼 그의 해법은 참 간결하기도 하지요. - 2010.10.28 문학집배.. 더보기
[문장배달 Best20] 니콜 크라우스「사랑의 역사」 (낭송 서현철, 김기연, 이화룡) 어제 밤하늘을 보셨나요? 이틀 동안 천둥이 치며 비가 내렸고 기온은 떨어졌고 기분은 우울해졌는데, 어젯밤 하늘에는 밭이랑 같은 하얀 구름들이 줄지어 서 있었거든요. 그리고 반달이 떠 있었어요. 서울에서 친구가 일산까지 찾아왔기에 만나러 나가던 길이었어요. 그러다가 그만 환하게 개는 밤하늘을 본 거예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중얼거렸어요. “야, 정말 멋진 밤하늘이야.” 이 며칠 우울했는데, 하지만 그걸 표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걸 금방 알아차리고 있었던 친구가 걱정스럽게 물었어요. “이제 괜찮아?” 걱정하는 친구 때문에 우울한 표정을 계속 지었지만, 사실 이미 달을 봤기 때문에, 또 내색하지 않고 두고봐주는 친구가, 그것도 앞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었지요. 다행히도 저 역시 점점 더 .. 더보기
[문장배달 Best20] 성석제「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낭송 이연규, 선종남) 언젠가 스페인에 가서 한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 할머니에게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죠. 상대의 모든 말을 한 번 더 따라하면서 박장대소하는 재능이었어요. 그 웃음에 전염이 돼서 급기야는 제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할머니는 그게 정말 우스운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웃었어요. 저도 지기 싫어서 손뼉을 쳐가면서 웃었어요. 할머니의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 전 취미가 소원리스트 만들기인데, 그 때 소원이 하나 더 추가됐어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 되기. 식당에서 사람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로 크게 웃는 법을 배우기. 이건 누군가 웃으면 반드시 따라 웃어야만 이룰 수 있는 소원이죠. 2009. 3. 19. 문학집배원 김연수.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성석제 .. 더보기
[시배달] 김광규, 「나」 (낭송 박은숙) 이름과 이름 뒤에 붙은 온갖 계급장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만, 그것이 지금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니죠. 당장 급한 밥벌이 문제,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해결하는 것만도 벅차서, '나'와 '내 삶'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런 건 먹고 사는 일을 처리하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천천히 생각해도 되는 한가한 일일지 모릅니다. 이 질문이 없는 동안은 스스로가 건강하다고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도 한없이 약해질 것입니다. 그때 이 질문은 느닷없이 기습하여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는 무엇인가?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2010.06.21 문학집배원 김기택 김광규. 「나」 (낭송 박은숙)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 더보기